정지아, 『빨치산의 딸』, 실천문학사, 1990.
- 정지아 작가의 글은 『천국의 이야기꾼, 권정생』을 먼저 읽었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나중에 읽었다. 한참 후에야 두 책의 작가가 동일한 인물이란 걸 알게 된 바 있다. 나라 위해 애쓰는 애국자로 인해 전쟁이 있을 것 같으면 도리어 그런 애국자가 없는 평화가 낫다고까지 역설했던 권정생 선생은 전쟁으로 인해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걸 누구보다 아파했다. 동화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편들어주는 권정생에게 정지아는 자신의 부모 모습을 보았을 성싶기도 하다.
작가의 부모는 빨치산이다. 아버지는 전남도당조직부부장 출신이고, 어머니는 남부군 정치지도원을 지냈다. 부부는 해방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의 시기에 지리산, 백아산 일대에서, 계급 없이 다 같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사투를 벌였다. 이후 부부는 수감 생활의 고충도 견뎌야 했겠지만 무엇보다 풀려난 이후에도 빨갱이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과 싸워야 했다. 반공 시대를 살아가는 딸이 정체성 혼란으로 방황하는 모습도 지켜보아야 했다.
부부의 딸인 작가는 이 시절을 “나는 어항 속의 붕어였을 뿐이었다. 어항의 벽을 깨뜨릴 수 없다면 굴욕적으로 숨쉬느니 어항 벽에 머리를 박고 죽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내게는 벽을 깰 방법이 없었다”고 고백하며,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음으로 해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으로 해서 세상을 비웃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딸이 오랜 방황 끝에 부모의 삶을 이해하고, 부모에게 덧씌운 허물을 벗겨내기 위해서라도 빨치산과 부모의 삶을 온전히 그려낼 작정을 한다. 이 책 『빨치산의 딸』은 그 결실이다. 아버지, 어머니의 육성뿐만 아니라, 빨치산에 몸담았고 또 쓰러져갔던 수많은 이웃들을 불러낸다. 빨치산 대장인 이현상과 박종하에 대한 기록도 풍성하게 남겨놓았다.
정지아 작가는 소설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역사는 소용돌이치며 저 거대한 지리산의 산맥처럼 수많은 봉우리를 만들며 흘러간다. 우리는 어떤 봉우리를 만든 것일까. 우리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또 다른 동지들이 정상에 오를 것이다. ‘평등’이란 말만큼 매혹적인 게 어디 있는가. 불평등한 세상이 계속되는 한 우리처럼 그 말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불꽃 같은 열정으로 다시 혁명을 꿈꾸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라고. 어머니의 육성을 빌렸지만, 빨치산 부대원 한 명 한 명의 생생한 꿈이요 이제 자신에게 넘어온 꿈의 모습이 이러하다는 것이겠다.
『빨치산의 딸』은 기본적으로 빨치산에 대해 가족 혹은 동지적 입장을 가진 상황에서 쓰였다. 빨치산 당사자로서의 기록과 그 의미 부여에 충실한 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전쟁 이후의 근대사가 그 반대쪽만 부각하고 언급해온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균형적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을 준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의 딸』 그 후일담 성격이 짙은데, 자기 몫을 해내고 한결 편안해진 상태에서 농담과 재미, 연민과 공감이 서사에 물씬 스며들게끔 해서 근래 크게 사랑받고 있는 줄 안다. 어항 벽에 자진할 것을 생각하던 작가는 이제 어항을 깨고 나가서 강물을 점프하고 산야를 날고 있는 중일 테다.(이동훈)

'감상글(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세이> 빈방의 빛: 시인이 말하는 호퍼 (0) | 2024.04.28 |
---|---|
<에세이> 좋은 삶을 위한 인문학 50계단 (0) | 2024.04.26 |
<역사소설> 연산의 아들, 이황 (0) | 2024.03.19 |
<에세이> 동네 책방 분투기 (0) | 2024.02.19 |
<에세이> 일흔에 쓴 창업일기 (0) | 2024.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