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스트랜드(박상미 역), 『빈방의 빛: 시인이 말하는 호퍼』, 한길사, 2007.
- 호퍼(1886〜1967)의 그림은 미국 도심과 그 안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본때 나는 도심 풍경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황량하고 적막한 정서를 풍기는 쪽이 많다. 호퍼는 당대 혹은 이후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작가 등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많이 준 화가로도 손꼽힌다.
이 책을 쓴 시인인 마크 스트랜드(1934〜2014)와 번역가인 박상미도 호퍼의 팬이다. 스트랜드의 『변방의 빛』은 호퍼의 여러 그림에 대한 자기 인상을 밝혀 적은 글이다. 호퍼의 전기를 기대했다면 다른 책을 구하는 게 나을 테고, 그림을 이렇게 봐도 되는구나 하는 쪽에 관심이 있다면 유용한 독서가 될 것이다.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1960)은 정장 차림의 중년 여자와 비키니에 가까운 편한 복장의 젊은 여자가 베란다에 나란히 앉아있는 풍경이다. 책을 잡고 있는 중년 여자의 시선도 밖을 향해 있다. 이 그림은 공간적인 구도 그 자체로도 주목되지만 관객 입장에서 어떤 서사를 떠올리기 충분하다. 스트랜드는 이 그림에서 양쪽의 균형을 본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야기가 제자리를 잃고 너무 멀리 가버리면 그림의 기하학이 우리를 그림 속으로 불러들이고, 그림의 기하학이 시들하게 느껴질 때쯤이면 다시 서사의 가능성이 제자리를 주장하면 다가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nighthwak(밤을 새는 사람들)>(1942)에 대해선, 그림을 보고 있으면 “두 개의 모순적인 명령어 사이에서 주춤거리게 된다. 사다리꼴은 가던 길을 계속 가라고 우리를 재촉하고, 어두운 도시 속 다이너의 환한 실내는 우리에게 머물 것을 종용한다”고 말한다. 박상미 번역가도 ‘떠남과 머무름의 역설’이란 후기를 덧붙이며 스트랜드가 호퍼를 이해하는 시각에 공감한다. 실제 호퍼의 그림 속 많은 인물은 화면 바깥을 내다보고 있거나 아예 아무것도 담지 않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낯선 곳을 응시하며 문득 떠나려는 마음을 먹다가 또 그러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처럼 비치기도 한다.
스트랜드의 책을 번역하면서 박상미 쌤은 그림에 대한 저작권 문제로 출판이 보류되던 상황을 짚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호퍼를 전하는 데 애썼던 이유를 이렇게 적어놓았다.
“대세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향해 끈질기고 깊이 있게 천착한 호퍼를 통해, 그의 그림을 통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안의 사소하고 가냘픈 ‘어떤 것’이 들어 올려지는 경험을 했다”는.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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