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톰소여와허크 2024. 5. 19. 00:02

 

이재동,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학이사, 2023.

 

- 서문이 아름다운 글로 소문난 이재동 변호사의 책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를 읽으니 서문은 아름답고 본문 또한 배움을 주는 아름다운 글들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의 성장사를 쓴다. 고향을 떠나 우연찮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병원 근처의 학교를 졸업하게 된 사연, 이청준의 눈길과 오버랩되는 모자의 사연이 먹먹하고 아름답게 읽히는 건 개인의 특별한 사연뿐만 아니라 이를 문장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문체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건조한 법의 언어를 떠나 술술 잘 읽히는 문체를 구사하는 솜씨는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책 목록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저자는 사회, 경제, 인문을 망라하는 독서 경험에 시집을 늘 읽고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첫 번째 시인은 김수영으로 보인다. 자신을 억압하던 내부, 외부의 요인을 파고들며 그것과 솔직하게 대면하려 애썼던 김수영 시인과 결이 통했을 성싶다.

 

책에서 정의와 공정에 대한 담론도 주목된다. 공정을 내세워 오히려 소수와 약자에 대한 적극적 배려를 주저하게 되는 것은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보수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저자는 그렇게 이해한다. 저자는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빌려 자신의 정의관을 드러낸다.

존 롤스와 이를 인용한 저자의 생각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타고난 환경이나 지능, 건강, 외모 등에 관하여 모르는 상태를 상정한다면, 재화의 총량이 크고 능력에 따른 빈부 격차가 큰 사회가 아니라 최하층이 좀 더 나은 생활을 하는 사회를 선택할 것이므로 이것이 더 정의로운 사회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다. 아닌 게 아니라 출발점부터 이미 차별이 시작되고 기득권층이 재화를 독식하고 그들이 경쟁에서 유리한 국면을 갖는 게 정의로 포장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다. “젊은 세대의 공정에 대한 관심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능력주의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약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저자는 자신의 뜻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뜻은 인간미 있는 평등한 삶과 결부되어 있을 것이다.

 

재판에서 법리를 다투는 직업을 가진 저자는 법관에게 부족한 것은 법률적 지식이 아니라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서민의 팍팍한 삶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해와 공감을 넓히기 위해서 세상에 대한 깊은 관여를 통하여 구체적인 사건을 통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호전적 낙관주의자가 되자는 긴즈버그 대법관의 말과,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김수영의 시구와, 영화 <변호인>에서 억울한 사람 편에 서서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외치던 장면을 소환하며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선 잘못된 것과 싸울 줄 아는 낙관주의자가 필요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의 저자는 우울증을 부르는 사회의 엄숙주의를 비판하며 친목과 유머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저자는 페이스북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세상 읽기를 보여주고 때로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운 기타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특히 저자는 누군가의 연결고리가 되어 도움을 주고받는 일들이 귀한 경험임을 말하며, “개개의 사람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연결고리이고 그 고리가 빠지면 세상의 한 부분이 무너지고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고 덧붙였다. 저자와 당신과 또 나와 무관하지 않은 연결고리란 단어가 아주 인상적으로 와 닿지 않는가. 서문의 어머니 사진 한 장과 함께.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