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숙, 『굳세어라 의기양양』, 북인, 2024.
- 신은숙 시인은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하다. 이번 산문집으로 산문도 잘 쓴다는 것을 보여주며 산문 안에 자신의 그림과 시와 인생을 함께 담았다.
시인의 고향은 탄광 마을인 양양 장승리다. 열한 살 때까지 살았던 이곳이 글과 그림의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인은 어머니의 일기 두 편을 산문에 넣었다. 시어머니의 구박과 남편의 무정한 태도로 가출한 이야기가 아프고도 흥미로운데 그때의 남편이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수고했어, 고마워.’라고 한다. 근래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자연스레 연상이 된다.
드라마 속 광례, 애순, 금명으로 이어지는 삼대의 이야기는 녹록하지 않은 환경 속 자기 꿈의 확장과 그 실현의 서사다. 서사의 흐름이나 정도는 제각각이겠지만 바다에서 일하다가 병을 얻은 금명의 아버지와 평생 광부로 일하다 폐를 상한 시인의 아버지 그 마지막은 별로 다른 점이 없다. 무엇보다 늦게 자기 이름으로 시집을 낸 애순이와 마흔을 넘어 시인으로 데뷔하며 자기실현을 하고 있는 신은숙 시인과의 거리는 제주와 양양의 거리보다 가까울 것도 같다. 산문집 제목, ‘의기양양’에서 의기는 어머니의 어릴 때 이름이라고도 하니 제목도 이보다 잘 뽑을 수가 없겠다.
신은숙 시인의 문학 수업은 읍내로 나간 열한 살 때 다락방에서 읽은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명작 전집이 대신해 주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북유럽 동화, 소공녀, 소공자, 15소년 표류기, 그림형제 동화 등에 푹 빠져 지낸 시절이다. 그 배경에는 쌀이 없어도 할부로라도 책을 들여놓았던 어머니가 있었다.
책에 인용된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는 어머니를 추억하는 시다. 개심사 모란이 지고 원주 송정암에서 모란 닮은 꽃을 본다. 작약이다. 작약은 어머니의 모란 자수를 떠올리게 한다. 광부의 아내로 고된 시집살이하는 중에도, 학교 앞 구멍가게를 꾸려 가는 중에도 밤마다 짬을 내어 수를 놓던 어머니는 딸에게 모란 자수 침대보를 물려주지만 시인은 이사 과정에 이를 잃어버리고 말았단다.
팔랑,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작약은 귀를 접는다
그리운 이름일랑 죄다 모아
저 귓속에 넣으면
세상의 발자국도 점점 멀어져
나는 더 이상 기다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 -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중에서
시인은 “마음의 귀를 열어 작약 봉오리처럼 단단한 시를 써야겠다는 다짐”을 둔다. 시의 배경이 된 송정암은 인연 있는 스님이 살고 있단다. 스님을 닮아 허술해 보이는 암자의 산신각은 시인이 좋아하는 장소다. 산신각을 옆에 두고 책 읽는 모습의 그림이 다사로워 보인다.
인연 있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면 언젠가 시나 그림이 될 것도 같은데, 시인은 10년 이상 고양이와 동거하면서 아직 고양이에 관한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단다. 마음에 있으면 어떻게든 올 것이라고 믿는 편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기대와 여유가 있어 좋다. 특별히 서둘 일은 그렇게 하기도 해야겠지만 마음이 오가는 것을 가만히 재어 보는 시간이 소중해 보인다.
시인의 고향인 양양이나 현재의 거주지인 원주로 갈 일이 생기면 『굳세어라 의기양양』도 가방에 넣어가도 좋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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