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정지용(1903-?, 충북 옥천)

톰소여와허크 2010. 8. 28. 23:45

 

정지용(1903-?, 충북 옥천)

 

 1929년 대학 졸업이후 모교인 휘문고보에서 영어교사로 16년간 재직했다. 제자 오장환에게 시수업을 했고, 이상을 시단에 등단시켰고, 1939년 <문장> 지의 추천 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박남수 등을 문단에 등단시켰다.

 정지용의 그의 시만큼 독설과 기지로도 유명했다. 그 날카로움과 매서움이 이상과 쌍벽이었다. 오죽했으면 홍효민 같은 사람이, 정지용과 이상을 단 위에 앉히고 독설시합을 벌이면 어떻겠냐고 술자리에서 제의했을 정도였다. 이 같은 독설과 기지, 자존심과 순진성으로 무장한 지용은 그 무렵, 시내로 나오려면 군복과 같은 당고바지를 벗고 바지저고리 위에 검은 두루마리를 걸쳤고, 어떤 때는 개화장을 들고나서기도 했다.

 이태준의 집 뒤 언덕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초가 정자가 있었다. 그곳에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곤 했다. 정지용과 이병기도 때때로 초청을 받았다. 정지용이 술잔을 거푸 비운 다음에는 시 낭독이 있었다. 그는 이상의 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인들의 시를 한두 편 외웠다. 그리고 반드시 그의 <향수>와 <고향>도 읊었다.

 시문학사 간판이 붙어 있는 견지동 집에는 박용철과 그의 젊은 부인 임정희가 뒷방에서 살았다. 임정희는 정지용이 올 때보다 술을 내왔고, 굴비며 몇 년 묵은 어란도 내왔다. '몇 년 묵은 어란'이 특히 정지용의 입맛을 당겼다. 분위기가 익으면 또 시를 낭독했다. 신석정은 "지용같이 시를 잘 읊는 사람은 보지 못했노라."고 뒤에 술이 들어가면 곧잘 말했다.

 휘문교사 시절 가끔 학교 수업 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신경통"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지용은 194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직장을 옮겨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다. 여대생들은 정지용의 강의보다는 눈 오는 밤에 마차를 타고 함께 아현 고개를 넘어 동대문으로 가서 정종을 마시고, 돈이 남으면 형제주점에 들러 추어탕 먹는 것을 좋아했다. 술이 들어가기만 하면 정지용의 호주머니는 남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여학생들에게 지용이란 이름 대신 '정종 선생'으로 불리게 되고 말았다.

 정종 선생은 취하면 옷을 벗는 습관이 있어서, 한 학부모의 초대를 받아갔다가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강의는 언제나 만원이었고, 그는 그들에게 평범한 사람이 되라고 되풀이하여 강조했다.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자 7월 하순 3-4명의 젊은이들에게 모시고의적삼 차림으로 끌려가 북한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함께 수감되었다가 그 후 폭사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지용은 작은 체구로 얼굴에 예지의 기상이 번득였으며, 비범한 눈빛이 영롱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고 박두진은 한 천재시인을 기억한다.

 다음의 내용은 김학동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구읍, 현재 하계리 40번지, 청석교 바로 옆의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연일정씨 정태국을 아버지로 하고, 하동정씨 정미하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언제인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갑자기 큰 홍수가 져서 송두리째 유실되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다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한약방을 하던 부친은 그의 사람됨과 약의 효험으로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고안한 처방으로 '정고약'을 만들어 인근으로 많이 팔려갔다고 한다. 처음에는 한약상이 잘 되어 어느 만큼의 재산을 축적했으나, 불의에 밀어닥친 홍수의 피해로 인해 가세가 갑자기 기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지용이 옥천보통학교를 마치고 한문을 자수하다가 휘문고보에 진학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옥천읍에서 보은 쪽으로 쭉 뻗은 아스팔트 길을 따라 3킬로미터쯤 가다가 구읍의 진입로를 따라 잠깐 걸으면, 바로 앞에 산뜻한 학교건물이 다가선다. '죽향국민학교'란 교명과도 잘 어울리게 단장되어 있다.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옛날의 건물을 그대로 복원한 듯한 목조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 건물에서 바로 정지용이 다니던 옥천공립보통학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학교 건물이 불타 버렸으나, 옛 모습대로 보존하기 위해 똑같이 복원했다는 것이 관계자의 말이다.

 정지용은 이 학교에 1910년 4월 6일자로 입학한 것으로 되어있다. 재학 당시는 그렇게 두드러진 학생이 아니었던 듯, 학교 성적은 중간 정도를 유지했다. 4년 동안의 수학기간을 마치고 1914년 3월 25일 졸업했다.(4회) 정지용이 처음 입학할 당시에는 50명 가까이 되었으나, 졸업한 학생은 16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어 한 시대를 마감한 듯한 느낌마져 든다.

 정지용이 결혼한 것은 보통학교 졸업을 얼마 앞둔 4학년 때였다. 1913년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 사는 은진송씨 명헌의 딸 재숙과 아주 어려서 결혼한 것이다. 연애는커녕 맞선조차 못보고 어른들이 정해준 요식에 따라 한 결혼이 아닐까 한다. 서로 만나서 살다보면 정의가 두터워지고 그래서 백년해로하는 그런 전대의 습속을 따라 그들은 결혼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농촌에서는 웬만큼 부유한 가정이 아니고서는 자녀들을 서울로 유학시킨다는 게 그리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정지용은 워낙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의 가까운 친지들의 권유로 휘문고보에 진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지용이 휘문고보에 입학한 것은 1918년의 일로 그의 나이 17세 되던 해이다. 그는 집에서 학비를 계속 못댈 형편이어서 한때는 어느 사무실의 사환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지용의 이런 사정을 알 게 된 휘문고보 교사의 소개로 민영휘를 만난 뒤로는 줄곧 교비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휘문고보 시절 정지용의 학업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으로 그의 재능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의 성적표에 나타난 것을 보면 창가나 체조 등 일부 실기과목을 제외한 학과성적은 극히 우수한 편이다.

 이렇게 맺어진 휘문고보와 정지용과의 인연은 보다 깊은 관계로 이어진다. 평생을 통하여 그는 20여년을 휘문고보에서 보낸 셈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개안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휘문고보 시절 교우로는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이태준 등과의 선후배 사이로 주고받은 자극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휘문의숙에서 사립휘문고등학교로 개편되면서 동교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하는 '문우회'를 결성했다. 이 문우회의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는 총회와 대의원제도를 두었고, 그 집행부의 하나인 학예부에서는 박종화와 홍사용, 정백(화가) 등 세 사람이 중심이 되어 <피는 꽃>이란 회람지를 내기도 했다. 이무렵 정지용은 일학년생으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그의 문학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는 조숙한 학생으로 쉽사리 학교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고,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모아 <요람>지를 기획하기도 했다.

 정지용은 휘문고보를 마치고 곧바로 일본의 경도에 있는 동지사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거기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서구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서구문물에 대한 경이감이나 황홀감도 느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멀리 이국의 하늘 밑에서 느끼는 고독과 향수, 그것은 서울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것보다 훨씬 절실했는지 모른다.

 동지사대학에서 정지용은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윌리엄 블레이크와 불원백추의 시를 읽고 배우면서 그의 시에 대한 시야는 한층 넓어졌다. 그 자신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이 천재시인에게는 쉽사리 익혀져 변용되기 마련이다.

 정지용은 동지사대학에서 발행되는 잡지 <동지사문학>에 일어시 <말>을 발표했는가 하면 불원백추가 주재한 시 전문지 <근대풍경>에다 <카페 프란스>,<바다>,<슬픈 기관차>등 많은 작품을 발표함으로서 주변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방학이 되어 일본에서 돌아온 정지용은 부친께 천주교를 믿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젊어서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고 있을 때부터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마로 재산을 잃게 된 부친은 그동안 그의 독실한 신앙생활의 보상이 고작 이거냐 하고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중단한 부친께서는 후에 둘째부인 문화유씨를 만나 화용과 계용등 두 자녀를 두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향수>에 나타난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에서 '어린 누이'는 바로 계용을 이름이며, 정지용이 독자로 외롭게 지내다가 이복동생을 맞아 그 사이는 무척 다정스러웠다는 것이다.

 이같은 제의를 받고 아버지는 얼마 후에 둘째부인 문화유씨와 헤어지고 천주교에 다시 귀의했으며, 그 뒤고 정지용의 집안은 4대에 걸쳐서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둘째 아들 구익은 신부가 되기 위해서 휘문중학을 중단하고 원상에 있는 덕원신학교까지 갔다고 하니, 그 가족의 천주교 신앙이 얼마나 독실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철저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정지용은 6,25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있다가 신의 가호를 받지 못한 채로 납치되어 종적을 감추고 만 것이다. 저 세상에서 성신의 구원을 받아 승천했는지 몰라도, 이 세상에서는 본의 아닌 좌경시인으로 낙인찍혀 밝은 햇빛을 외면한 채로 비극의 시인이 되고 만 것이다.

 정지용은 1929년 동지사대학을 마치고 곧바로 귀국했다. 그의 가정형편으로는 일본유학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으나 모교인 휘문학교 교주의 온정으로 일본 유학까지 마친 것이다. 그리하여 동지사 대학 졸업과 동시에 모교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박용철과 김영랑이 기획하고 있었던 <시문학>지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잘 모르는 사이었으나, <학조>나 <조선지광>지를 통해서 발표된 정지용의 시를 읽고, 이 두 시골의 무명시인이었던 박용철과 김영랑은 그들이 기획하고 있는 시문학 동인의 첫 번째 포섭대상으로 손꼽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정지용의 시작활동이 본궤도에 오르게 된 것도 사실이다.

 정지용과 휘문고보와의 관계는 그가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단순한 인연으로 해서 성립된다. 이렇게 맺어진 정지용과 휘문과의 관계로 그 생애의 대부분을 여기서 머물게 될 줄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학생시절과는 달리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으로 바뀌어 다시 모교인 휘문으로 돌아온 것이다.

 시인이 시를 가르치지 못하고 초등영어만 가르치고 있다는 게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자신의 시를 곧잘 외우곤 했다는 정지용은 시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런 착잡한 심경이 학생들에게 자주 신경질로 나타났기 때문에 '신경통'이란 별명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시문학>의 박용철은 그 주변의 줄기찬 권고도 있었으나, 자신의 시집을 펴내기에 앞서 정지용과 김영랑의 시집을 냈다. 박용철은 결국 자신의 시집을 생전에 내지 못하고 만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시가 이 두 시인의 시적 수준에 못 미쳤던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박용철이 타계하자 정지용과 김영랑 등 시문학 동인은 그 유족들과 함께 서둘러 그의 유고시집을 일차로 펴내고, 그 다음에 산문집을 간행한 것이다. 시문학 동인을 비롯한 당시의 시인이나 작가들의 교분이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매우 두터웠던 이면을 엿볼 수가 있다. 이들의 이러한 우의와 정열을 바탕으로 우리 근대시단은 형성된 것이다.

 정지용의 첫시집이 시문학사에서 간행되자 그 반향은 자못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평으로 이양하의 <바라든 지용>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하겠다.

 구인회는 1933년 8월경 반카프적인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하여 발족한 문학동호인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인회는 한달에 한번쯤 모이는 친목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동안의 안부를 묻거나 잡담을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훗일 종로청년회관에서 강연회를 열 정도였는데, 이때 발표자는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등 세명 뿐이라고 하지만, 그 확실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지용은 구인회의 창립회원으로서 이태준과 함께 이 모임을 주도해간 것이다. 정지용이 이런 문학동인에 가담한 것은 시문학동인에 이어 두 번째이며, 이것이 마지막인 셈이다.

  <이화백년야사>에는 정지용의 이화여전 재직 시절의 모습이 남아 았다.

 1930년대의 한국문학에 모더니즘 시인으로 이름을 드날리던 정선생은 1945년 10월 개강과 함께 부임해서 3년간 국어와 영시, 라틴어를 담당했다. 애주가 호주가인데다 이름까지 비슷하여 학생들은 그에게 '정종'이란 별명을 붙였지만, 그의 기질과 휴머니즘을 좋아하고 따랐다. 눈오는 겨울밤에 제자들과 마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가서 넉넉잖은 월급을 털어 '황제주점'의 추어탕을 사주기도 하고 가난한 학생에게는 아낌없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 자신이 가난하므로 모든 가난한 사람을 사랑했다. 그의 소박한 휴머니즘은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학교에서의 그의 강의는 매우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출석 체크가 없는데도 타과의 학생들까지 몰려와 언제나 만원을 이루어 그의 문학강의와 라틴어강의까지도 어려운 줄 모르고 경청했다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 되라. 영웅심을 발휘하면 남을 다치게 되는 법이야" 라고 함은 그가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조한 말이라고 한다. 이렇듯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인기가 높았던 그는 "여자는 정말 가르칠 게 못 돼, 너무 지독해"란 말을 되풀이라고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사연인즉, 영문과를 중퇴한 한 학생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주었는데, 그 학생이 결혼 3개월만에 자살하고 그 뒤를 이어서 남편도 자살하여 두 번이나 화장터를 다녀온 그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은 사표를 내었다고 한다. 이때 정지용은 이화여전과 경향신문사를 겸직하고 있었다.

 좌경문학집단인 문학가동맹에 잠시 그 이름이 오르내린 것도 이 무렵이다. 이태준이나 김연만 등 문장지 멤버들은 물론, 그 주변의 문인들이 권유했거나, 아니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의 이름을 적어넣은 것이 아닐까도 여겨진다. "나는 공산주의는 싫지만 몇 십년을 두고 사귄 우의는 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정지용이 임화나 이태준 등 문학가 동맹의 친구를 만나면 입버릇처럼 한 말이라고 한다.

 정지용의 산문집을 보면, 그 당시 쓴 시론류의 글에서 이런 심적 갈등이 극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몰고가는 사회여론을 그는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내심으로는 백범의 노선을 따르고 그런 논지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유족의 말에 따르면, 정지용은 녹번리 초당에서 6,25사변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 7월에 자주 드나들던 설정식 등 2,3명의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한참 이야기하다가 그들과 함께 잠시 다녀온다고 하고 아무 마련도 없이 나간 뒤,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지용의 비극적 행각은 시작되었고, 그후 계속해서 근거없는 소문들만 무성하게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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