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1454∼1488)
1469년 11월 숙부인 예종이 죽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성년의 나이인 스무 살까지 7년 동안 할머니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정희왕후는 한명회 등의 권신들과의 결탁을 위해 성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곧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예종의 아들 제안군과 성종의 형 월산군을 대군으로 격상시켰다. 월산대군은 성장하여 이미 19세의 나이였으므로 좌리공신 2등에 책봉하여 불만을 무마시켰다.
한명회의 딸이 왕비가 된지 5년만에 죽자, 정희왕후는 숙의로 있던 윤 씨를 왕비로 삼았다. 윤 씨는 윤기무의 딸(후에 폐비되어 사약을 받게 되고, 이것이 아들 연산의 분노로 이어짐)로 절세미인이었던 까닭에 성종의 사랑이 대단하였다. 성종은 할머니, 어머니, 숙모 등 세 분의 왕대비와 형님인 월산대군에 대한 마음이 지극했다. 그들을 위한 연회를 벌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특히 월산대군에게는 형을 젖히고 왕이 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지라 더욱 각별하였다.
월산대군은 풍류 즐기기를 좋아했기에 언제나 성종이 마련한 연회에서 즐겁게 놀았다. 또한 자신의 별장 옆에 정자를 짓고, 정자에서 한강까지 물길을 틔워 배도 한 척 띄워 두었다. 배를 타고 정자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신선놀음과도 같아서 모두 부러워했다. 정자에서 놀이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언제나 성종이 갖은 준비들을 해주었다.
월산대군은 결국, 자연과 책을 벗하며 풍월로 세월을 보냈다. 『풍월정집』20권이 전한다
덕수궁은 원래 성종 임금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선조와 광해군이 임시 궁으로 사용했고, 인목대비가 폐비되어 유폐되어 있기도 했다. 후에 순종이 아버지 고종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덕수는 장수하라는 뜻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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