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진 (柳致眞, 1905∼1974, 경남 통영)
거제도에서 한약방을 하는 아버지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유치환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3 1운동 이후 교육의 필요성에 눈을 뜬 아버지의 권유로 후일 시인이 되는 동생 치환과 함께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유치환은 김진섭, 서항석 등의 해외 유학파 동인들과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하고 그의 희곡들을 공연하였다.
첫 작품 '토막'공연은 (1931~1932 문예월간 2~3호) 성공적으로 끝났으며 그것은 이 땅에 희곡이 문학으로 태어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소' 또한 일제시대에 고통받는 농민의 삶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쓰여졌는데 이 '소'로 인하여 그는 이해랑, 박동근 등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 이후 현실비판에 좌절을 느끼고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를 등장시켜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작품 '마의태자'를 발표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궁극에 다다르자 유치진도 일본의 강요에 의해 대추나무, 흑룡강, 북진대 등의 친일 희곡을 쓰고 공연했다. 그러던 중에 해방을 맞았고 그는 속죄하는 기분으로 민족의 분단과 전쟁의 참혹상을 드러낸 사실주의극을 썼다.
광복 후의 (자명고/1947) (원술랑/1950) (사육신/1955) (한강은 흐른다/1958)를 잇따라 발표했다.
그는 국립극장을 세울 것을 정부에 건의하고 극장장을 맡아 (1949년~1952년) '대학생 연극 경연대회'를 열었고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의 전신인 드라마센터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하였다. 신구나 반효정 등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라성같은 많은 중진배우들이 바로 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이다.
아래는 연극평론가 박영정의 글을 줄인 것이다.
[유치진(아호 동랑)은 1905년 경남 통영에서 아버지 유준수(柳俊秀)와 어머니 박우수(朴又秀)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에 도일하여 호우야마(豊山)중학에 편입한 이후 1931년 릿교(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기까지 10년여 동안을 일본에서 지낸 그는, 1931년 귀국하자마자 신극운동 단체인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이후 그는 [토막](1932), [소](1935)를 비롯하여 [조국](1946), [흔들리는 지축](1947),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희곡을 발표하여 근대연극사 제일의 희곡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또한 그는 1974년 고혈압으로 운명하기까지 연극 연출을 비롯하여 연극평론 발표, 극단 운영, 드라마센터 건립 등 다방면에서 연극문화의 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이다. 이렇듯 근대연극의 발전에 공로가 크고, 그것도 3.1 운동을 희곡화한 작가 유치진에게 친일 작가 운운하는 것은 얼른 보면 부당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조국]만을 읽고서 자란 세대에게 유치진은 민족적 양심을 지닌 작가로서만 기억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조국]은 해방 이후, 즉 이 땅에서 일제가 물러간 후 누구나 애국을, 독립을 운운하던 바로 그 시절에 창작된 작품이다.
[왜 싸워]를 두고 왜 싸워?
이 말은 1957년 말 지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왜 싸워 사건'을 다룬 한 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이 '왜 싸워 논쟁'은 흔치 않은 연극계의 논쟁이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지금도 아슴푸레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희곡 [왜 싸워]는 1957년 당시 한국연극학회 회장이던 유치진이 전국남녀 대학생 연극경연 대회에 상연하고자 제출했던 작품이다. 학생극 진흥을 위해 좋은 창작극을 선보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자유문학}지에 1차 발표를 하고, 동시에 대학생들에게 작품을 주어서 무대에 올리도록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자유문학}를 주관하고 있던 김광섭(金光燮)이 [왜 싸워]는 친일작품 [대추나무]의 개작이므로 경연대회에 상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유치진과는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 시절 활동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이자 동지이던 김광섭에 의해서 '친일작품'을 상연하려 한다고 갑작스럽게 매도를 당하니, 유치진으로서는 이만저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간지에 두세 차례 설전이 있고 나서 사태는 흐지부지 진정이 되었지만, 유치진에게는 다시 한 번 '친일작가'라는 낙인이 찍히는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그런데 많고 많은 작품 가운데 하필이면 [대추나무]였을까. 훗날의 자서전에서 유치진은 이 [왜 싸워]를 선택한 이유를 나름대로 밝히고 있다. 유치진은 친일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흑룡강]이나 [북진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대추나무]는 작가적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작품일 뿐더러, 대학생 연극대회에 [왜 싸워]를 내보임으로써 [대추나무]에 씌워져 있던 친일의 굴레마저 벗어 던질 수 있다는 자못 거대한 욕심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추나무]는 1942년 가을 당시의 관제 연극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 주관의 제1회 (친일)연극경연대회에 출품하여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는 전력이 있는 친일연극이다. 그럼에도 [대추나무]가 외형의 경력은 그렇더라도, 내면에 있어서는 당시 민족의 현실을 우회적으로나마 다룬 작품이라는 작가 자신의 평은 견강부회적 변명에 가깝다. [대추나무]를 {신시대}라는 잡지에 발표하였던 1942년 10월, 유치진은 [창성둔(昌城屯)에서]라는 기행수필을 {국민문학}지에 발표한다. 이 무렵 희곡 발표 외에도 [싱가폴 함락을 축하하며]({매일신보}, 1942. 2. 19)라는 일본의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일반 시사 수필까지 틈틈이 발표하던 그는, 그 해 여름부터는 직접 만주지방을 기행하면서 보고서 형식으로 쓴 수필 [개척과 희망]({매일신보}, 1942. 7. 30-8. 5)을 발표한다.
[북진대](4막 5장)는 대추나무를 발표하기 반 년 전인 1942년 4월 4일부터 7일까지 경성부민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현대극장 배우들이 출연한 가운데 상연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대동합방론'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가지고 일진회를 이끌었던 이용구야말로 "한국을 열국의 세력 쟁탈장에서 구하고, 동양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은 그 동맹국인 일본과 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 선각자"로 인식시키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일종의 역사극이다.
현대극장의 창립공연은 유치진 작 [흑룡강](5막)이었다. 만주에서의 조선 농민이 일본영사관의 보호 아래 복지 만주(福地滿洲)의 터전을 닦아 나가는 것을 내용으로 한 [흑룡강]은 본격 '국민연극'으로서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이라 할 것이다.
유치진이 친일연극 활동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유치진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극예술연구회(1931)를 조직하여 신극운동을 전개하던 초기에는 [토막], [소], [버드나무 동리에 선 풍경] 등 비교적 일제하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던 가난한 농촌의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적 작품을 남김으로써, 우리 희곡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작가다. 그렇다고 그가 당시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을 하던 작가들보다 저항성이나 민족의식의 토대가 강했던 것도 또한 아니다. 그의 민족의식이 허약했기 때문에, 일제 말이 되자 앞에서 살펴본 대로 '국책연극으로서의 국민연극'의 진흥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나 '국민연극'에 관해서라면 유치진만이 유별나게 나서서 설친 것도 아니고, 신파 배우든 좌익 출신이든 할 것 없이, 어떤 면에서는 한결같이 '국민연극'의 각본을 쓰고, 연기를 하고, 연출을 하고, 무대장치를 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일일이 거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거의 모든 연극인이 국민연극에 종사했다. 일제의 탄압이 가장 심해진 1940년대에 들어서 그 많은 연극인 가운데 한 사람도 투옥되거나 심지어는 상연 금지된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은 이를 잘 웅변해 준다. 따라서 유치진의 친일연극은 그 개인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비극적이지만 전체 근대연극사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다(이 때문에 연극계는 해방공간에서 일제 잔재 청산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이 문제를 훗날의 과제로 남겨 놓게 된다).
일제하에서 활동하던 지식인치고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식민지하에서의 연극인 또한 우리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에서 연극을 해야만 했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 그러한 고충을 우리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안다. 그러나 아무리 개개인의 면면과 고충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국민연극'으로 근대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역사적 과오는 오늘의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아래는 유민영의 글이다.
[ 올해(1991)는 연극의 해로 정해져서인지 연초부터 많은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근대 연극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에 대한 다각적인 조명과 작품공연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런 중에서도 첫번째 인물로 등장한 유치진의 대표작이 3편이나 무대에 올려졌다.
그렇다면 근대극 연극사의 거목(巨木)으로 인정받는 유치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근대연극사 1세기동안에 부침했던 어떤 인물보다도 출중했다. 그가 출중했던 것은 역시 연극에 미친 영향이 광범위한데 있다. 대체론 앞서 간 연극인들이 어느 한 장르에 걸쳐서 활동한데 반해서 그는 극단운동(1931년 劇硏조직)으로부터 시작하여 극작(劇作), 극이론, 극장경영, 연출, 연극교육 등 전 장르에 걸쳐서 손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가령 극연(劇硏)창단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신극운동의 단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극연(劇硏)이 해방이후 극협(劇協)과 신협(新協)으로 이어져서 우리나라 정통신극의 맥을 이은 것이다. 다음으로 희곡창작만 하더라도 처녀작 <토막>을 쓴 이래 40여 편을 발표하여 소위 리얼리즘의 기초를 닦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은 함세덕, 김진수, 차범석 등도 모두 리얼리즘의 줄기를 형성한 후학들이다. 오늘날 그나마의 창작극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어느 면에서 보면 유치진이 1930년대에 닦아놓은 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지나치게 계몽적 민족주의에 기울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현대 희곡이 예술적으로 격조가 높지 못한 결과도 낳았다고 볼 수가 있다. 그는 또한 연극이론에도 손을 댔는데, 그것은 연극비평 부재로 인해서 타락한 상업극이 대중의식을 좀먹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연출솜씨도 극작 못지 않았다. 30년대 극연(劇硏)에서 홍해성(洪海星)이 동양극장으로 떠난 뒤에 연출을 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60년대까지 이어져서 리얼리즘 연출의 예법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업적중의 하나는 역시 극장경영이었다. 1950년 초대 국립극장장을 필두로 해서 60년대의 드라마센터 건립운영은 우리나라 극장사의 빛나는 업적이다.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드라마센터를 통해서 두가지 중요한 일을 했는데, 한 가지가 인재양성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 가지는 전통극의 현대 전승이다. 즉 그는 60년대 초에 연극아카데미를 시작하여 작가와 배우를 길러냈는데, 그것은 뒷날 서울예술전문대로 이어져서 연극, 영화, 방송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오늘날 연극계와 방송드라마 연기자중에 상당수가 드라마센터 출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가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끼친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그는 60년대 중반 드라마센터에 전통연극부를 두고 우리나라 가면극과 꼭둑각시극의 전승에도 힘쓴 바 있다.]
유치진의 고향은 통영으로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다. 1990년 11월 통영문화재단이 남망산 공원에 이순신장군 동상과 3.1독립운동 기념비를 지척에 두고 유치진의 흉상이 세우자 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는 '유치진 흉상 철거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철거요구를 하였다.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철거를 약속하고도 기일을 미루다 광복 50주년을 맞는 1995년에 자진 철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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