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탁(1263-1343, 단양)
아래는 정해유의 글이다
[ 우탁 선생은 1263(원종 4)년 단산현(丹山縣) 금수산 칠성봉 아래(지금의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 천규(天珪)의 아들로 태어나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 감찰규정(監察糾正), 성균좨주(成均祭酒)을 역임후,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다가 1343년(충혜왕 복위 3년)에 예안에서 81세에 사망하여 그의 묘소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지삼리에 있다.
예안(禮安)에 은거시 당시 원나라에서 새롭게 유입된 「역경」의 정전을 아는 사람이 없자 역동선생은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만에 터득하여 후진에게 가르치니 비로소 성리학을 행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易역이 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여 '易東역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은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자인 동시에 시조문학(時調文學)의 효시(嚆矢)로 탄로가(嘆老歌)를 남긴 분이다.
"한손에 막대 집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嘆老歌 탄로가)
말년의 역동 선생이 늙음을 한탄하며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탄로가」는 그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예안면 지삼리 '鼎井齋 정정재' 재실 정원과 충북 단양시 대강면 사인암 암벽에 새겨 전한다.
그리고 역동선생은 어릴 적부터 성격이 곧아서 자기주장을 분명히 폈고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당사자가 어른일지라도 꼭 짚고 넘어가는 올곧음이 있었다. 1308년 충선왕원년 易東역동 선생이 감찰규정(監察糾正) 벼슬을 지낼 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 원비와 통간하자 역동은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왕의 곁에 있던 신하가 격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를 못하자 역동 선생이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경이 근신이 되어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그 죄를 아느냐?"고 통렬하게 꾸짖었다. 이에 늘어서 있던 좌우 신하들이 어쩔 줄 모르고, 왕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 극간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고려사'에는 다음 같은 우탁설화(禹倬說話)가 전하여진다.
어린 소년의 학문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했고 거기서 우러난 행동거지가 어떻게나 밝았던지 이미 학자의 학식과 군자의 품성을 갖췄다고 하여 과거에나 합격해야 주어지는 진사라는 벼슬 칭호를 15세 난 어린 소년에게 붙여 주었다.
처음에 그는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1290년(충렬왕 16) 그의 나이 27세로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처음 벼슬로 사록이라는 관직을 받고 지금의 경북 영덕군에 있던 영해 라는 곳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부임해 보니 이곳에 팔령이라고 이름하는,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어 주민들이 이 영험을 믿고 팔령신을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 팔령신이란 이름 그대로 여덟의 방울신을 일컫는데 이들에게 재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화를 입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에 얽매여 힘겹게 재물을 바쳐야 하는 주민들의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학에서는 민간신앙인 이러한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철저한 유학자인 우탁이 이를 그냥 둘 리 없었다. 그는 이 팔령신을 타파하는 데 아주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한다.
그 하나가 여덟개의 방울을 만들어 그것을 부수어서 바다에 빠뜨림으로써 팔령신을 현지에서 구전되는 것으로, 여덟신 중 일곱을 없애고 나머지 하나마저 없애려 하자 살려 달라고 싹싹 비는데 보아하니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호호한 백발의 가련한 할미라 이를 살려 주었더니 이 신이 지금의 당고개 서낭이 됐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우탁에 관한 인물전설이 '우탁설화'라고 하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전해 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철저한 유학자로서 폐해가 컸던 미신 타파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우탁은 주역의 이치에 능한 사람이었다. 주역은 일명 「역경」이라 하는데 약칭으로 그냥 '역'이라고도 한다.
'역'은 괘를 따져 의미를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에 능하면 길흉을 점칠 수 있다. 주역의 이치를 깊이 공부한 우탁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역학자였으며, 또 이를 넘어서 도술까지 부렸다고 한다.
어느 여름날 개구리 울음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우탁이 "네 이놈들 계속 그렇게 기승을 부리면 멸종을 시킬 것이니라." 하고 글을 써서 개구리들에게 보내니 동헌으로 개구리들이 떼로 몰려와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 했다는 이야기와 호랑이가 사람과 가축에 해를 끼치는 것을 보았을 때도 이런 방법을 써서 퇴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문인 일화(ㅂ-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곡(1298-1351 , 충남 한산) (0) | 2010.08.30 |
---|---|
은희경 (1959- ,전북 고창) (0) | 2010.08.30 |
유치진 (柳致眞, 1905∼1974, 경남 통영) (0) | 2010.08.30 |
유치환(1908-1967, 경남 통영) (0) | 2010.08.30 |
월산대군(1454∼1488) (0) | 2010.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