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1908-1967, 경남 통영)
청마는 1908년 음력 7월 14일 경남 거제시 둔덕면 빙하리에서 아버지 유준수와 어머니 박우수의 8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작시 해설 《구름에 그린다》를 접하여 보면 자기가 태어난 곳과 마을을 거제도가 아닌 통영으로 적고 있다. 시 <출생기>를 해설하는 대목에서 "내가 난 때는 1908년 즉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전전해로서 갈팡질팡 시달리던 국가 민족의 운명이 마침내 결정적으로 거꾸러지기 시작하던 때요, 난 곳은 노도처럼 밀려 닿던 왜의 세력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던 한반도의 남쪽 끝머리에 있는 바닷가 통영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청마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풍경과 생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자라던 집은 바닷가 비탈이며 골짝 새로 다닥다닥 초가들이 밀집한 가운데… 선창가엔 마포(지금의 마산) 하동 등지로부터 장배들이 수없이 들어 닿고 쌀, 소금, 명태 등속의 물주 집 창고들이 비좁게 잇달아 서서 언제나 품팔이 지겟군들이 우글거리는 고을 바닥의 중심지 가까운 행길 가에 시옷자로 붙어 앉은 초라한 초가였습니다."
청마의 꿋꿋한 선비정신은 유생인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청마의 넉넉한 마음과 유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청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천궁행(實踐躬行) 근검절약을 생활 신조로 삼는 아버지의 다스림 아래서 정말 검소한 가운데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의 그러한 실천은 자기가 넉넉치 못한 유생의 출신인 때문이었으리란 점을 장성하여야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계에 있어 8남매를 거느린 어머니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던 것을 어린 마음으로도 항상 듣고 보고 느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집안에서 항상 기쁘고 즐거우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언제나 너그럽고 이해심 많고 빳빳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푸지고 유머러스하고 풍족한 성품이었는데, 동랑(유치환의 형 유치진)이나 내가 얼마간의 문학적인 자질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다분히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청마의 방랑은 초등학교를 마친 15세 때 일본의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고향을 뜬 것을 시작으로 19세 때 귀국 부산 동래고보 진학, 20세 때 서울 연희전문 진학, 21세 때 다시 도일 사진학원 다님, 25세 때 평양 이주 몇 달 사진관 경영, 27세 때 부산 화신연쇄점 근무, 30세 때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 33세 때 만주로 가 하르빈 농장관리 및 정미소 경영, 38세 때 귀국하여 다시 통영에서 교직에 몸담으면서 41세 때 경남 안의, 43세 때 부산 이주 6 25 종군작가 참전, 46세 때 대구, 48세 때 경주, 55세 때 대구, 56세 때 부산경남여고 교장에 부임하면서 부산에 다시 정착했다.
청마의 교직 경력은 줄잡아 30년에 이른다. 1934년에서 1940년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1945년에서 1948년 통영여중 교사, 1948년에서 1955년 경남 안의중학교 교사, 1959년 경주고 교사, 1961년 경주여중고 교장, 1962년 대구여고 교장, 1963년 부산 경남여고 교장을 거쳐 1965년 부산 남여상 교장 재직 시 운명하게 되는데 스스로 원했던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특히 여학교에 많이 재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산 경남여고에서 남여상으로 전근 발령이 났을 때는 경남여고 학생들이 철회시위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남여상 교정에는 청마가 운명한 그 해 가을에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을 모아 졸업생들이 세웠다는 시비가 있다.
교장 재직 시절의 일화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결재도장을 교장실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알아서 찍어 가게 한 것, 운동장 조회에서 확성기로 학생들을 나무라자 그 소리가 밖으로 나가 소문이 나면 누가 우리 학생들을 며느리로 데리고 가겠느냐며 훈계는 육성으로 하라고 당부했다는 것, 맑은 가을날의 전체 조례 때 학교장 훈화 순서에서 높고 청명한 하늘만 바라보다 말았다는 일화 등이 있다. 조례대에 선 청마의 그런 모습은 가녀린 풀잎 같기도 하고 아래의 시처럼 강건한 <바위> 같기도 했을 것이다.
통영을 떠나 일본과 만주, 경상도의 여러 지역을 몇 년 주기로 떠돈 청마가 돌아온 곳은 부산이었고 거기서 그는 60세가 되던 1967년 2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기까지 말년을 보냈다.
2000년 6월 통영에 '청마 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시인이 생전에 소장했던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유리관 쪽에, 김춘수, 문덕수, 조지훈 등으로부터 받은 편지들이 빛이 바랜 종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그 중 한 편지가 언뜻 눈에 들어온다. “유치환님, 그 동안 바쁘셨지요. 경주로 가신 얘기 들었습니다…” 유치환이 경주고등학교 시절 윤이상으로부터 받은 육필 편지였다. 입구에 두 종류의 판넬 액자가 전시되고 있었는데 하나는 시 「깃발」, 「그리움」과 시인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청마 시화(詩畵)였고, 하나는 ‘충무시민의 노래’ 악보와 윤이상의 얼굴을 넣은 악보화(樂譜畵)였다. 두 명의 우뚝한 예술인들에 대한 자긍심과 예향으로 발돋움하려는 시 당국의 노력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문학관 위쪽에는 생가가 있다. 그런데 현재 유치환의 생가는 두 곳이다. 통영 외에 거제도 둔덕면에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연보를 보면, 유치환은 ‘1908년 경남 통영시 태평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통영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두 살 때부터이고 태어난 곳은 ‘거제도 둔덕면 방하리’라고 한다. 하지만 통영 쪽에서는 그런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둔덕면은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곳일 뿐 실제 태어난 곳은 바로 ‘통영시 태평동’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거제도에도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작품을 썼던 곳에 도 기념관이 세워졌으니 시인으로서 복에 겨운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시인을 두고 마치 소유권 다툼을 벌이듯 두 지역이 오랫동안 줄다리기하는 것이 결코 아름답지는 않다. 현재 청마의 시비만도 전국 11기이다. 개인 시비로 청마만큼 많은 시비를 가진 시인도 드문데, 고향에서도 생가를 두 개나 가진 시인이 되고 말았다.
통영의 생가는 청마의 부친 유준수가 경영하던 유약국의 분위기를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원래 유생이었던 부친은 재미 삼아 한의학을 공부하다가 나중엔 정식 한의 과정을 거쳐 ‘유약국(柳藥局)’을 차리면서 통영에 뿌리를 내렸다. 청마는 어린 시절 주로 통영의 외가에서 자랐는데 그때는 외조모가 지어준 ‘돌메’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돌처럼 단단하고 산처럼 여물어 오래오래 살라는 뜻이다.
통영여고에는 그가 교사 시절 작사를 하고 동료교사이던 작곡가 윤이상이 작곡을 한 교가가 남아서 불려지고 있으며, 시비는 윤이상과 자주 올랐다는 남망산 중턱에 세워져 항구를 굽어보고 있다.
중앙동 우체국도 여전하다. 이영도가 살고 있는 길 건너 이층집을 바라보며 청마가 편지를 쓰고 부쳤다는 곳이다.
[전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 우체국을 오가는 중에 쓰여졌을 청마의 <행복> 시비(詩碑)가 우체국 화단 앞에 세워져 있다. 청마는 통영여중 재직 중에 새로 부임해 온 이영도 시인을 만났고 그가 보낸 무수한 편지 중의 일부는 훗날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이영도 시인에게 보낸 6천여 통의 편지뿐만 아니라 또 다른 여인에게 보낸 편지도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그만큼 청마의 내부는 그리움과 연정으로 늘 들끓고 있었던 셈이다.
중앙동 청마거리 근처에는 부인이 운영하던 충무교회 내 문화유치원과 청마 재직 당시 통영여중 교사로 사용했던 통영문화원이 있었다. 그 시절의 문화유치원 건물은 헐린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교회에 속한 유치원은 아직 존속하고 있었고 통영여중 교사로 쓰던 붉은 벽돌의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다.
통영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 만나 결혼에 이른 부인 권재순 여사에게 청마는 일본 유학시절 이틀에 한 번 꼴로 편지를 쓸 정도로 연정을 표시했었다고 한다. 장녀 유인전은 “우리의 잘못을 얼굴 붉히고 큰 소리로 꾸중하지 않고 어머님을 통하거나 해서 바른 길을 가르쳐주시던 아버님을 저는 철들면서부터 두려움과 존경으로 대해왔습니다."고 했고, 차녀 유춘비는 "아버지는 누구에게나 관대하고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았다. 또 평소에는 조용히 집필에만 열중하시다가도 약주만 드시면 호방한 웃음과 유머로 온 가족을 웃기셨다. 일제시대 창씨개명을 할 때 우리 형제들이 아무리 졸라도 지금 이름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들어주시지 않아 학교에서 야단맞은 일도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청마는 한 글에서 ‘나는 시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글이 문학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오직 내 글이 인생의 목숨이 희구하는 바 그 진실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것을 증거함으로써 족할 따름이요, 그 증거를 위하여만이 내 글로 값쳐질 것입니다.’라고 했고 시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의 자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제가 인간으로서의 완성으로 이끌린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우주의 기이하고도 오묘한 섭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에서 사랑이란 그 자체의 근원이 사랑하는 사람인 대상이나 그 어느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랑하는 자신 쪽에 있는 것이며 그의 자신의 내부에서 어쩔 수 없이 우러나는 희구의 발현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앞의 글은 자신의 문학이 삶의 진실을 찾아가는 도정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마의 문학관을 함축한 것으로 읽히고 뒤의 글은 그 긴 도정을 가능하게 하는 열정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다. 여인들을 향한 연서들은 남녀간에 빚어진 사랑의 결과가 아닌 자신의 내부를 향한 거듭된 질문과 답변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유치환과 김소운의 우정도 특기할 만하다. 1940년 청마는 농장 경영을 빙자하여 가족들을 끌고 북만주로 떠났다. '슬픈 별에서 태어난' 이라고 그가 수식한 적이 아이가 죽었는데도 묻을 산이 없어 허허벌판 밭두렁에 묻고 왔다는 내용의 편지를 김소운에게 보내왔다. 1945년 3월 김소운은 만주에 가는 길에 천리길을 달려 하얼빌으로 갔다. 청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청마도 4백 리를 달려 그곳으로 왔다. 그들은 어느 지하 바에서 보드카를 들이켰다. 보드카가 하나도 독하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 사이도 해방 직후 김소운이 일본인 골동품을 물려받아 떼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잠시 뜸해졌다. 그때 김소운이 동래 일신여학교 뒤에서 가축들을 기르고 묘종을 가꾸면서 세상과 담을 쌓고 있었는데, 어떤 영문인지 세상에서는 김소운이 일본놈 덕에 졸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사람이 청마가 동래에 와서 사흘 묵고 갔다는 말을 했다. 곧이 들리지 않았다. 신경에서 하얼빈까지 장장 천 리를 찾아갔는데, 그가 이 읍내에 와서 나를 찾지 않다니. 그는 청마가 자고 갔다는 집으로 달려갔다.
확실히 청마가 사흘 자고 갔다고 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가축이며 미수확의 농작물과 가재도구들을 헐값에 팔아넘겼다.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 시비를 세웠다. 상화의 시 때문에 시비를 세운 것이 아니라 청마 때문에 세웠다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원활해진 것은 청마가 시 원고를 들고 와서 선해 달라고 부탁하면서였다. 시를 추리다가 청마 작품이 갖는 사회에 대한 비분과 강개의 함성에 소운은 서운한 감정을 푼다. 청마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의감과 사회인식으로 뒷날 청마는 대구여고 교장에서 좌천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교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의 4.19 데모를 선동했다는 것이다.
시인 박재삼은 사람은 청마가 으뜸이고, 시는 미당(서정주)이라 했다. 6.25r 일어나기 직전 정지용이 남도 여행길에 청마에게 들렀다가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는데, 해방 직후 좌우익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자식까지 잃어버린 정지용이 한밤중에 꺼이꺼이 울었다고 한다. 청마의 인품이 정지용으로 하여금 그런 울음을 터트리게 한 것이다.
정지용이 다녀간 지 일 년 뒤 서정주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찾아왔다. 그의 귀에서는 "빨갱이, 빨갱이"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일제 말에는 친일을 했고 해방 공간에서는 우익문단의 전위에 섰던 서정주의 병세는 6.25 전세와 함께 급격히 악화되어 갔다. 그는 잠을 잘 자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청마는 결혼해서 아기를 가진 큰딸과 갓난아기를 서정주가 머물고 있는 방에 밀어 넣었다. 초록빛 새순 같은 아기를 보면 서정주의 마음이 살아날까 해서였다. 청마 유치환는 다른 동료들이 의지하고픈 그런 시인이었다.
이승에서의 청마의 삶 역시 길 위에서 끝이 났었다. 1967년 2월 13일 저녁의 일이었다. 예총 부산지부장 선출에 따른 불협화음를 의논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 청마는 현 지부장의 자격으로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시인 김규태 소설가 윤정규 등 실무자들을 광복동 에덴다방으로 불러내 이야기를 나눈 후 자리는 자연스럽게 단골술집으로 이어졌다. 강직하고 깨끗했던 청마의 성품으로는 그런 잡음이 개운치 않았을 것이고, 선거 뒷처리를 원만하게 마무리할 방안을 찾던 참석자들은 슬슬 술기운이 고조되었을 것이다. 일행은 술자리를 옮겼고 청마는 다음날 학교일 때문에 지갑을 털어 술값을 내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소설가 윤정규 선생은 그렇게 먼저 일어난 청마 선생을 남포파출소 앞의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 드렸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운명의 날 저녁 부산진에서 내려 수정동 집으로 가기 위해 봉생병원 앞에서 길을 건너다 청마는 과속으로 달려오던 차에 치였다. 부산대학병원으로 옮겼으나 운명한 뒤였는데 큰 외상은 없었으며 사인은 뇌진탕이었다. 청마의 장례행렬은 영도 남여상에서 시청을 거쳐 장지였던 에덴공원으로 이어졌는데 KBS부산방송은 이 과정을 1시간 30분동안 중계했다.
윤정규 선생은 아침에 일어나 보도를 접하고서야 청마 선생이 간밤에 운명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타깝게 그날 주머니를 다 털게 하지 말고 택시를 태워드렸더라면,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사람의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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