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황지우(1952- , 전남 해남)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31

황지우(1952-  , 전남 해남)

 

 시인 황지우의 본명이 "황재우"라는 사실은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타자기로 "황재우"를 치려던 것이 그만 "황지우"를 치게 되어,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이걸로 하자, 해서 "황지우"로 개명하게 되었다는 것.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일화이기도 하려니와, 약지의 놀림이 조금 엇나가 'ㅐ'를 'ㅣ'로 쳤다는 것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시인은 1952년 전남 해남 출생이다. 서울대 미학과를 거쳐, 서강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현상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한신대학교 문창과 황재우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83년 첫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간행 이후,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나는 너다』, 『게눈 속의 연꽃』,『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이어지는 시집으로 그는 인기 시인이 되었다.  

 특히, 시집 90년대 후반 발표한『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현재까지 12만부가 훨씬 더 팔려나간 상태다. 그로서는 8년 만에 묶어낸 시집이었다. 애초에 황 시인이 이 시집을 묶으면서 제목을 시집에 실린 시들 중 한 편의 제목인‘등우량선(等雨量線)’으로 하자고 고집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출판사 편집부 담당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제목은 안 된다는 거였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시집은 근래 드문 베스트셀러 시집이 됐고, 덕분에 황 시인은‘내 집 마련’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황지우는 진흙을 주무르고 작품을 빚어서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라는 제목으로 조각전을 열기도 했다. 또한 광주항쟁을 소재로 드라마를 쓰기도 했다. 그의 드라마 ‘5월의 신부’는 책으로 나왔을 뿐 아니라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20년 전 광주에서 학살과 항쟁이 진행되었던 그 열흘 동안의 시간에 맞춰 실연됐다."5ㆍ18 민주화운동이라는 객관적 사건 자체가 「지역주의」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는 게 가슴 아픕니다."고 황지우는 말했다.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잘 먹음과 잘 삶이 다 혐의점이다> <내 실업의 대낮에 시장 바닥을 어슬렁거리면,/ 그러나 아직, 나는 아직, 바닥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구나./ 까마득하게 멀었구나> 등 당대 젊은이의 폐부를 찌르며 80년대 시의 한 상징으로 남은 이 시들은 지금도 매년 3쇄를 찍는다고 한다. 기억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골목 벽보, 시사만화, 상업광고 등 전혀 시적이지 않은 요소와 언어들이 무시로 차용돼 「형태 파괴의 시」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니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황지우는 "시적 형식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 시집의 수명을 길게 해준 것 아닌가 싶습니다. 형식까지도 의미심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요. 일그러지고 부서진 시의 형식은 80년대의 제 경험, 특히 고문의 체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느 산문에서 "나는 한 번도, 이른바 「실험시」를 쓴 적이 없다. 나는 리얼리스트이다. 일그러진 형식은 일그러진 현실에서 온다"고 쓴 바 있는 그는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서울 종로 지하철역에서 뿌리다 검거돼 계엄합동수사본부 밀실에서 20여일간 「통닭구이(물고문)」, 몽둥이 찜질 등 갖은 고초를 당해야 했다. 나이 서른이 안된 젊은이로 두 갓난 아이의 아버지이자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던 대학원생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은 일시적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고문의 악마성이라고나 할까, 한 인간이 자기 삶 속에서 맺어온 모든 관계를 고문은 한순간에 파괴시켜 버립니다. 이미 짜여진 「픽션」으로서의 조서 완성을 위해 결국 친구의 이름을 대고 그 친구가 고문의 고통과 배신감에 외치는 비명과 저주를 지켜보아야 하고…. 그 자기 혐오감…."

 황지우는 이 휴유증으로 정신병을 앓기도 했다. 새벽 한시에서 세시 사이, 그는 그날 낮에, 밖에서 한 소리들을 환청으로 다시 듣곤 했다. 이걸 오랫동안 즐겼다. 여기에 오래된 우울증도 있었고 정신분열증 징후도 있었다. 우울증은 걱정이 덜했지만, 분열증 조짐은 꽤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진흙 조각은 석고 작업에의 몰두가 그를 많이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아래는 황지우 시인이「어느 날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란 시집을 발표한 직후 어느 강연회에서 발표한 내용의 일부로서 시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시의 출발은 항상 사춘기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를 처음 썼던 때가 중학교 3학년 때 쯤으로 생각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고 괜히 누군가 보고 싶어지곤 했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동경이라고 할까, 설렘이 있던 바로 그 자리가 시가 태어난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자신 대학에서 시작법을 가끔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는 걸 느낀 적이 많습니다. 시에 대해서 일정한 이해나 믿음들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기본적인 약속 아래서 시 쓰기를 해야 할 텐데 딱히 '시는 이런 거다'라고 말하기는 참으로 힘듭니다.

 제 경우에는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나곤 합니다. 후줄근한 차림새의 우편 배달부 청년이 망명 생활 중인 대시인 네루다에게 자꾸 접근하면서 시가 뭔지 좀 가르쳐 달라고 하지요. 이 청년이 시를 필요로 하는 목적은 뻔해서, 시인 하면 떠올리는 것은 여자들한테 편지가 많이 온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베아트리체라는 아름다운 술집 종업원 아가씨에게 접근하기에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써 시를 쓰고 싶어했고, 네루다를 계속 졸라댔지요. 거기서 네루다가 청년에게 알려준 시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은유(隱喩)였습니다. 네루다는 시를 물으러 온 첫 순례자라고나 할까, 순진무구한 청년에게 '시는 은유다'라고 넌지시 일러줍니다.

 어느 날 해변가에서 수영을 즐기다 나온 네루다는 편지 한 통을 들고 찾아온 청년에게 지금 자기가 쓰고 있는 시를 읊어주죠. '바다는 일곱 개의 초록 혀이다/나는 바다다/나는 바다다/그 이름을 부르며 절벽을 내리친다' 이런 시를 읊어주니까 청년은 '말들이 어지럽다. 말들이 출렁이는 배처럼 어지럽다'라고 말하죠. 그러니까 네루다가 '그래, 그게 바로 메타포라는 거야'라고 일러줍니다. 말들이 흔들리는 배처럼 어지럽다. 말들이 반복되면서 출렁출렁거린다는 것을 흔들리는 배처럼 어지럽다라고 말하는 게 은유라는 거죠.

 모든 시가 은유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저 장대한 교향곡, 어마어마하게 큰 대성당 따위의 건축물, 저 신나고 스피디하고 스펙터클한 영화,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매력을 지닌 연극… 이런 여러 장르의 예술에 비한다면 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른바 미디엄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시는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일 뿐이죠. 다른 예술 장르들은 미디엄이 굉장히 크고 매체 자체가 주는 파워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입니다. 시는 미디엄 자체가 언어 외에 아무 것도 없으므로 여러 예술 가운데 시는 가장 시시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언어라는 미디엄을 같이 공유하는 게 소설일 텐데, 시는 짧기도 하고 압축시켜야 하는 등 모든 예술 장르 가운데 어떤 면에서 가장 초라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라하고 시시한 시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힘, 눈부신 매혹을 자랑하는 것은 많은 시인들이 구사하고 있는 은유 덕분입니다. 은유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보들레르의 시들을 흔히 예를 듭니다. 보들레르는 「원수」라는 시에서 '내 청춘은 한갓 캄캄한 뇌우(雷雨)였을 뿐'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내 청춘은 캄캄한 번개였다. 내 청춘은 캄캄한 날벼락이었다' 이 시가 언어로써 성립시키는 '청춘은 번개다'라는 은유를 피카소 같은 대화가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습니까? 그 어느 위대한 작곡가라 하더라도 언어로써 딱 완성되는 청춘의 번개를 어떻게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건축가가 청춘의 뇌우를 대리석을 얹어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은유는 시의 가장 고유한 힘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모든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은유로 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 멋진 표현들로만 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금방 질리고 맙니다. 어떤 삶의 비밀을 알려 주는 내용이 배제된 채, 수사적으로만 은유를 사용할 때 그것은 공허해집니다. 삶의 비밀을 압축하면서 하나의 은유가 성립되었을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이를테면 젊은 시절의 보들레르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악이라고 표현한 현실 속에서, 금치산자로 알콜 중독자로 매도당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자신만의 지고한 이상을 모순어법적으로 이 더러운 현실 속에서 언어를 보석화시켜서 '내 청춘은 캄캄한 번개였다'라는 놀랄 만한 은유를 성립시켰을 때 시는 어떤 예술 장르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시를 쓸 때에는 자전거를 끌고 대시인을 찾아다녔던 우편 배달부와 같은 수준도 못 되었습니다. 연애 편지를 잘 쓰기 위해서 쫓아다니다가 은유라는 것을 체감적으로 터득했지만, 시가 처음 찾아온 사춘기 무렵에 내가 생각했던 시란 지금 생각해도 유치무비한 것이었습니다. 김소월의 '초혼'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혹은 이발소 그림과 함께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라는 속된 경구 수준이었거나, 아니면 소월류의 직설적인 감상주의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손위 형님이 자기가 쓸려고 사다둔 60년대 일기장이 있었어요. 그 일기장에는 매월 그 달에 어울리는 우편엽서 같은 풍경에 시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11월이면 낙엽이 쌓여 있었고, 거기에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시가 적혀 있는 걸 좋아서 외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6월이었던가, 사슴이 멀리 있는 숲을 배경으로 릴케의 '고독'이라는 시가 실려 있었어요. 별것도 아니었는데 '고독 너의 희푸른 이마에 나를 눕히노니' 하는 부분을 읽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슴이 무너져내려 견딜 수 없게 하는 걸 경험했습니다. 아마 다른 많은 분들도 시를 읽으면서 얼마쯤 다르기는 하지만 저와 마찬가지의 경험들을 했을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주저앉는, 길을 걸어가다가 무릎의 힘이 푹 빠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아 버리는 느낌을 경험한 사람만이 시를 읽을 수 있고 시를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를 쓰고 읽고 즐기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눈, 시의 눈이 가슴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시를 향한 눈이 먼저 열려야 다른 사람의 시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감흥이 반복되면서 눈높이가 점점 올라가고 시적 수위가 높아질 때에 시를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가 나를 찾아와서, 시가 들어갈 가슴에 있는 경락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흔히 낙서를 하기 시작합니다. 낙서를 하고 그 낙서가 떨어지는 글자로 끝나지 않고, 대개는 친구건 이성이건 누군가에게 편지, 혹은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모든 시의 출발은 이 일기장과 연애 편지가 아닌가 합니다. 밑 모를 두려움과 함께 자기 자신이 항상 못마땅해 자책하는 심정이 되었을 때, 또는 마음이 밖으로 열려서 누군가가 보고 싶어질 때, 혹은 어떤 곳으로 훌쩍 가버리고 싶어질 때에 품는, 이른바 먼 곳에 대한 동경을 우리는 낭만성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시의 출발점은 이 낭만성, 자기의 다른 것에 대한 그리움, 설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40이 넘고 전업작가로서 시집도 내고 하는 이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고, 모든 시인들은 최초의 그 자리, 낭만성이라고 하는 불편한 공명통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백발이 성성한 정현종 선생님을 연세대에 가서 뵈었는데, 제가 약간은 속으로 비난하는 투로 '선생님, 선생질 재미있습니까?' 했더니 파안대소를 하시면서 '지금도 젊은 여제자를 보면 연애하고 싶어' 그러더라구요. 아! 저게 시인이구나 항상 어떤 동경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가 시인이구나 하는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문예반 한답시고 고등학교 때부터 벌써 머리가 벗겨진 조숙한 친구 녀석과 같이 서로 불량배 흉내를 내면서 교복도 이상하게 입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를 대학에서도 만났는데, 저보다 시적 수준이 높고 시 써놓은 것을 보면 진도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녀석이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시를 노트에 써서 읽어 보라고 주었습니다. '왜 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나는가'라는 시를 보여 주었는데, 당시 나는 '무슨 시가 이러냐? 이미지도 없고 시어도 아름답지 않고…' 하며 김수영의 시를 못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시인이었다는 것도 몰랐고 대학에 와서 접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문학지인 「현대문학」 등을 읽으면서 나도 금방 시인이 될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대학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김수영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또 정현종의 시들을 만나면서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 이전에 내가 시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유치한 한낱 감상주의의 똥물에 불과했는지, 얼마나 거짓되게 언어만을 이쁘게 다듬은, 마치 가성으로 입을 모으고 점잖게 노래부르는 여학생 같은 시만에 길들여져 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시적 수위가 높아지는 것은 경멸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일정한 시들에 대한 경멸 혹은, 그 동안 자기가 시라고 생각했던 것, 자기가 써놓았던 시들에 대한 혐오감 따위가 젊은 시절의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내가 써 놓았던 것들이 밤에는 위대한데 아침에는 형편없어지는 그게 정말 속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쓰라림이 진하면 진할수록 시의 눈높이가 올라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눈높이만 높다고 해서 좋은 시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눈높이는 높은데 시는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눈을 높여야 한다는 것. 자신의 눈높이만큼 시를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보는 것, 그리고 낙차에 대해서 진실로 괴로워해 보는 것 그런 괴로움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좋은 시에 대해서 찬탄할 수도 있고, 이런 경멸과 찬탄이 반복되면서 시적 인간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중략)

 언어를 가능하면 줄여야 합니다. 언어를 현저히 결핍시키는 것이 시이죠.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의 밸런스가 시일 터인데, 시는 오히려 말하지 않은 것, 여백에서 숨겨 두었던 것, 여기가 시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은 꼭 해야 할 것만 간신히 하는 것이 시이다, 언어의 결핍이되 역시 언어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시와 선은 상당히 닮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선은 언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깨달음을 얻으면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지만, 시는 도의 경지까지 가버리면 끝나버리죠. 시는 도의 경지까지 가면 안되고 그 근처에서 어른거리다가 다시 내려오고 하는 경계상의 떨림이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의 담양 체류 시절, 「게눈 속의 연꽃」이라는 시집에 그런 저의 흔적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적인 것이 놓여 있는 성층권, 즉 정신의 성층권, 거의 산소가 희박해서 숨도 쉴 수 없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없었고 또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다가 문득 거꾸로 추락해서 진흙 속에 처박혔다. 그래서 저는 어두운 선으로서 인간의 심층에 놓여 있는, 어두운 것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해서 이번에 나온 시집에는 선적인 깨들음을 많이 담고자 애썼습니다.

 가령 정신병자가 복도를 강으로 착각하고 건너지 못하듯, 모든 시적인 메타포의 원리는 착각입니다. 환자는 고통을 받겠지만, 멀쩡한 사람이 복도를 강으로 생각하면 시가 됩니다. 고통을 받기는 하지만, 정신 질환적인 내용 자체는 어떤 시적인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신질환자의 착란이 시인 것은 아니지만, 90년대의 이념이 상실되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는 지나온 한 시대의 정신적 풍경을 그려보고자 했던 게 작년에 나왔던 시집 「어느 날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입니다. 아무튼 한국시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지 말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다음은 황지우에 대한 고은 시인의 말이다.

[ 우리 황지우를 만나노라면 몇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우러난다. 그 하나는 그를 만나기만 하면 만사에 대한 안도감이 생겨나서 이 세상에 대해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신뢰감이 아니라 일종의 불가사의에 가까운 풍요에 해당한다. "황지우의 삶만큼 궁핍의 시대를 넘어선 초궁핍의 도량을 갖춘 시인이 어디 있을까" 하고 나는 여러 시인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에게는 언제나 슬프도록 넉넉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담고 있는 푸짐한 몸조차도 그 마음이 만들어내는 마음의 기구인지 모른다.

 어느 때는 추운 겨울의 저녁 무렵에 헤어지면서 저 젊은 것이 너무 큰 궁리를 트고 있구나 어쩔거나 하고 나는 걱정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이 멀어지면서부터 나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나버렸거나, 아니 남아연방에라도 가 있는 것처럼 가슴이 저리는 그리움으로 달떠버리는 것이다. "에이 지우!"하고 그의 뒤를 쫓아가 그의 등짝을 탁 치고 싶은 것도 그래 본적이 없기 때문에, 여태껏 그에 대한 그리움 안에 포함된 예감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나는 시인 지우를 사랑해 마지않는다. 그에게 천부적으로 결핍된 사실주의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사실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달리, 그의 자유에 대한 무한한 질곡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질곡까지도 자유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1980년 5월 전국 비상계엄령의 극한상황에서 죽도록 얻어맞아서 같은 유치장에 들어 있던 강만길 교수가 피범벅이 된 볼기짝을 어루만지고 주물러줄 때도 그는 무던히도 어떤 무위를 자유를 누렸을 것이 틀림없다. 고통을 제례로 삼는 한 젊은 시인의 아름다움은, 그가 미학을 전공한다는 것과 동떨어져서 실로 처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도 외칠 줄 모르고 울부짖을 줄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그는 시 한 편이 나올 때 여러 의식의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의 촬영은 마지막 현상에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하는데, 이 과정이야말로 그의 독창적인 비극이다.

 나는 이런 황지우에게 무엇이든지 맡기고 싶다. 예술보다 인생을. 아냐. 인생보다 예술의 그 당돌한 직입!을

 우리 황지우를 만나노라면 또 한 가지 생각을 물리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위태위태하다. 내일 한 시인이 시를 내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바로 선방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에서도 그는 고립되고, 선방의 파초 잎새 아래서도 고립된 어정쩡한 상태로 한 무사승이 되어, 스승도 동반도 없이 있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되기 이전에 이미 선의 지경에 들어가 마음껏 노닐고 있는 성부르다. 다만 화두 하나를 붙들고 단전에 화두를 심어놓기보다는 몇 천의 공안, 몇 천의 화두를 두루두루 들어다 놓았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도 인연이 다하면 터벅터벅 산을 내려와, 이제 몇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옛 삼거리 주막에라도 들러 그 주막에 앉아, 왱하고 날아오는 파리 두어 마리와 더불어 궂은비 오는 들 가운데 왜가리나 바라보면서 담뿍 취해서, 점점 그의 얼굴은 취한 부처 얼굴로 웃음이 번져 나올 것이다. 안주 한 번 집어먹지 않은 채.

 사실인즉 그는 타고나기를 비승비속으로 태어났다. 그러니 만큼 일찌감치 이 세상의 모순과 황홀에 눈떠 그것을 터득한 소년기를 지나, 그가 시인으로 나오자 마자 그는 퍽이나 늙수구레한 덕망을 이끌고 원융과 2분법의 사고를 치러내면서, 그에게는 동서양이 하나의 어항 안에서 헤엄치다가 동작을 멈추다가 하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는 입산의 위험이 있고 산에서는 하산의 위험이 있다. 교묘한 것은 엘리어트가 에즈라 파운드를 찬양한 것 이상으로, 그는 이런 두 위험 가운데서 정말 교묘하게 그의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의 교묘함은 퍽이나 단호하다. 그가 <운주사>에서 바로 <대인동>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과정은 일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은 진흙덩이와 잘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그가 진흙 이불을 덮는다 해도, 그가 피워낼 것은 한 송이 내지 여러 송이 연꽃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이 연꽃의 아름다움이 관념의 미학으로 죽어버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 연꽃과는 십만 팔천 리나 떨어진 진흙덩이와의 접촉을 지향한다. 생각해보라. 연꽃이 연꽃만이라면 이미 꺾어져 죽은 연꽃, 시들어가는 연꽃인 터이다. 하지만 그 꽃이 진흙구덩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살아 있는 황홀이 아닌가. 그래서 황지우의 관념은 용해에 기여한다.

 우리 황지우를 만나노라면 어디 이 따위 따름이겠는가. 그는 대지의 시인이다. 그에게는 이런 정의가 하나의 완결로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요령부득의 행로를 무한히 보장하는 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의 길에는 종국적인 목적이 없다. 가는 것과 오는 것의 분별도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시인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두 가지를 다 준다. 자유의 행복과 음모의 불가능성이 그것이다.

 우리 황지우를 만나노라면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시대의 속도와 함께 가버리고 그 이름만 남은 것! <순정>이 아직 그에게는 온전히 남아서 <순정의 멸종>을 막아내고 있다.

 아마도 어떤 사려깊은 여자가 시인 황지우의 눈을 보게 된다면 잠깐 보고 말 수 없을 것이다. 그 눈이 깊숙히 간직하고 있는 우수와 무조건적인 평화, 그리고 남에게 털끝만치도 해를 끼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자존심 따위에 사로잡혀 하염없어할 것이다.

 여기에다 그의 운명에서 떼어낼 수 없는 순정이라니. 그 때문에 그는 퍽이나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생각건데 그의 시가 이른바 형태 파괴적이든 무엇이든, 거기에 거의 돌연변이와 같은 돈오주의적 해학이나 풍자의 자취가 역연한 바 있고, 이는 고전주의적인 운율 따위로부터 자유분방한 자동서술에 도달하는 역량은, 필경 그의 비극성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그를 흉내내는 일련의 시인들의 그것이 상당한 헛수고를 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즉 비극정신 내 비극의 미학을 다지지 않은 상태의 파격이란, 경망스러운 작위의 유희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시인의 순정과 해학이 시인적 품성과 시적 품격을 지켜줄 때, 거기에 황지우의 빗소리와도 같은 시의 미학이, 그가 터뜨리는 철학적이기까지 한 직관의 배열은, 그의 능란한 시각예술적 감각과는 달리 어떤 음악의 단계를 실현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80년대 이래 줄곧 그때그때의 시대적 격동기에 그 자신의 몸을 부딪치면서도, 결코 어느 편에도 불화를 일으키지 않으려다가 그 대가는 화해의 형이상학으로밖에 받아내지 못하면서, 순정 가운데서 떠나고 순정 가운데서 지치기도 했다.

 이 같은 시인의 순정은 바로 그 고향의 황토 산야에서 얻어진 것이고, 역사적으로 광주항쟁과 깊이 관련되고 있다.

 그는 몇 권의 시집을 낼 때마다 그의 동료적 찬미 가운데로부터 점점 그의 시에 대한 지지를 넓혀감으로써, 80년대 이래 남한 시단의 대표적 존재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둔탁하기조차 한 몸짓은 이런 위상에까지도 둔탁하다. 그는 시인 그 자체로서만 만족하고 있다.

 마치 그가 한 남편으로서, 한 아버지로서 완벽하지 못한 대신, 시인 자신에게도 허다한 연기와 나태를 동반하는 작업이면서도 그 모든 역할을 그 대신 누군가가 해주는 것처럼 꾸려나가는 사실은 거의 이적에 가깝다.

 나는 시인 황지우를 사랑한다. 이 말을 몇 번 거듭해도 싫증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그것은 그의 시가 쌓아온 성과와 함께 앞으로 그의 시가 쌓을 빛나는 성과가 반드시 우리 시의 역사에 대해서 한 흐름을 이루어나갈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가 추구하는 선방의 계송세계와 현실의 구체적 정서 변용을 아우르며 새로운 시의 전망을 펼칠 때, 거기에 시인 황지우의 한 국면이 완성될 것이다.

 우리 황지우는 축복을 할 수 있는 시인이다. 그 공덕으로 그는 끝내 커다란 축복 가운데 살 것이다. 그것은 미래이기보다 약속된 현재이다.]

아래는 황지우에 대한 차창룡의 평이다.

 [1995년 늦봄, 황지우의 조각전을 보고 《현대시학》에 간단한 소감을 쓴 적이 있다. 그때의 심경을 되돌아보기 위해 그 글을 찾아보려 했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글을 읽는 것은 분명 또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기분일 것이다. 황지우는 그 동안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라는 다소 쓸쓸한 제목의 시집을 펴냈다.

 황지우의 시는 아프다. 다섯 권의 시집을 거쳐오는 동안에 그의 시는 줄곧, 줄기차게, 날아가는 새들과 함께 세상을 뜨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온몸으로, 또는 손가락 끝만으로도 끈질기게, 너의 아픔마저도 나의 아픔이 되어, 피비린내나는 화엄의 바다에서, 늙은 육체를 이끌고도 아픔만은 왕성해 대용량으로 아파왔다.

 그러나 황지우의 시는 웃기다. 어떻게 보면 아프기 때문에 웃기다. 혹은 아프기 때문에 웃겨야 한다. 아픔을 이기기 위해선 웃겨야 한다. 그리하여 황지우의 시는 웃기다. “흐리고 바람 부는 날/ 언덕을 오르는 나에게/ 난데없이 대드는 흰 새를 나는/ 샥 피했다/ 피하고 보니, 나는 알았다, 누가 버린/ 農心 새우깡 봉지였다”(<비닐새>), 하하하, 이것이 황지우의 시다. 웃기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하나도 웃기지 않다. 슬프다. 그렇다. 황지우의 시는 슬픔으로 통한다, 결국에는. 아픔으로 시작했든, 웃음으로 시작했든 슬픔으로 끝난다. 아니, 슬픔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슬픔은 운동한다. 사방팔방으로 튀어 달아나서 슬픔은 또 다른 슬픔을 낳거나, 슬픔과는 상관없는 깨달음을 낳거나, 슬픔과의 교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

‘아픔’이란 현실적인 아픔이기도 하고, 아픈 현실을 바라보는 아픔이기도 하고, 아픈 나를 바라보는 아픔이기도 하고, 아픈 너를 바라보는 아픔이기도 하다.

 황지우의 현실적인 아픔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두드러진 것은 역사적인 아픔이다. <호명> <묵념, 5분 27초> <華嚴光州>는 광주항쟁의 아픔을 그린 시이고, <몬테비데오 1980년 겨울> <베이루트여, 베이루트여> <1960년 4월 19일·20일·21일, 光州> <14시 30분 현재> 등 많은 시들도 시대의 아픔을 그린 시이다.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아픔이 있는가 하면, 많은 개인들이 떠맡고 있는 아픔도 있다. 그 두 사례는 서로 얽혀서 개인적이면서 역사적인 경우가 많다. 가령 지하철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싸구려 군것질거리를 파는 사람들의 아픔 속에는 가난하게 살게 된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다. 황지우는 이런 아픔들을 끊임없이 관찰한다. 관찰하고 메모한다.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부분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그럴 수 없는 현실, 이와 같은 꿈과 현실의 불일치가 우리를 아프게 하고, 그러나 우리를 더욱 꿈꾸게 만들고, 그러나 결국 주저앉게 만들고, 이와 같은 엄숙한 의식을 영화관에서마저 행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들고, 그런 현실을 풍자하게 만든다.

 아, 그랬다. 우리는 그 시절 영화를 보러 가서 애국가를 불렀다. 온통 때려부수는 데 혈안이 된 영화를 보기 전에도 그랬고, 온통 섹스로 도배를 한 영화를 보기 전에도 아름다운 화면 속에서 경건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애국가와 함께 화면이 흐르고 화면 속에서 새떼들이 힘차게 솟구쳐오른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훨훨 날아간다. 아, 새들은 세상을 뜨는구나. 그렇다. ‘새들은 세상을 뜨는구나’가 맞다. 그러나 시인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고 말한다. 이 말은 새들마저도 세상을 뜨는데, 우리는 왜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지, 하는 탄식을 담고 있다. 새들처럼 우리도 세상을 뜨고 싶지만, 우리는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시절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래야만 했던 현실, 어느 날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집회에 나가서 ‘정화운동 결의대회’를 했고, 어느 날은 새마을 운동본부를 적극 지원했다. 명령을 거역하지 못해 사람을 쏘아 죽였고, 애꿎은 전투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졌으며, 화염병을 던지다 입대한 전투경찰은 살아남기 위해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아댔다. 모두들 세상을 뜨고 싶었다. 그러나 모두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황지우의 시 같은 냉소가 필요했다. 당시에는 그런 냉소가 그의 한계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냉소 없이 어찌 그 시대를 견뎠으랴. 황지우의 냉소는 날카로운 따뜻함, 서글픈 웃음, 통쾌한 풍자를 동시에 담고 있다. 그것은 현실을 재구성하는 여러 가지 방법적인 모색으로 이루어진다. 신문기사를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고, 벽보를 그대로 옮기기도 한다. 그의 방법은 대단히 모던한 방법으로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장 리얼리스틱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대부분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를 읽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집들을 통해 우리가 오랫동안 가져왔던 시에 대한 관념을 버려야만 했다. 시는 어떤 특별한 언어적 관념, 또는 관념적 언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 자체일 수 있다는 것, 현실 자체 안에 시적인 것이 스며 있고, 그 시적인 것을 일정한 장치 안에 담으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황지우의 시와 박남철, 이성복의 시는 시의 형태파괴에 대한 독자들의 당혹감을 즐기면서 끊임없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많은 화제가 되었던 첫시집이나 두 번째 시집보다 세 번째 시집 《나는 너다》를 좋아한다.

《나는 너다》에 실린 시들은 짧은 산문을 통해 번뜩이는  선(禪)의 지혜, 혹은 시적인 지혜를 제공한다.  황지우의 꿈은 멀리서 바라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가도 가까이 가면 또다른 무궁무진한 세계가 펼쳐지는 산이다. 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다이다. 화엄의 바다, 모든 것을 삼키는 화엄의 바다, 모든 것을 삼켰으나 또 하나도 삼키지 않은 화엄의 바다, 있는 그대로 둔 듯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품안에 품고 있는 화엄의 바다, 바로 《화엄경》에서 말하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임제가 말한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의 세계가 그것이다. 황지우의 시는 결국, 아픔으로부터 출발하여 때로는 풍자적인 웃음을 유발하고, 그 웃음 속에는 뼈가 있어, 깨달음의 섬광이 번뜩하여, 마침내 지혜와 화엄의 바다로 노저어가는 뗏목을 만든다. 그 뗏목을 타고 가다보면, <화엄광주>(華嚴光州) 이후 황지우의 시는 그가 꿈꾸었던 화엄의 바다와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섯 번째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는 허무의식을 읊은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화엄을 지향하되, 화엄이 될 수 없는 세계이다.

 황지우는 시집 뒤표지의 산문에서 “나는 환자로서 병을 앓으면서 병을 가지고 깨달음을 실행했던 유마힐 생각이 많이 났다”고 했다. 유마힐은 “일체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나도 병들었거니와, 만약 일체 중생이 병이 나으면 나의 병도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생사에 들었나니 생사가 있음에 병도 있거니와, 만약 중생이 병을 여의었을진대 곧 보살도 다시 병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유마힐이 중생을 위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았다면, 황지우는 ‘몽매’에 혹해 있음으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황지우는 실제로 이미 모든 것을 깨달았다. 깨달음의 세계가 결코 낙원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깨달았다. 더 이상 ‘화엄광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황지우는 계속해서 절망의 언어를 내뿜을 것이다. 그 절망의 언어 속에 번개같은 빛이 번쩍일 것이다. 가끔은 그 빛은 진짜 빛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진짜 빛은 번쩍이지 않는다(眞光不輝)라고 말할 것이다. 번쩍이지 않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닌 것도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황지우와 황지우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은 어느 날 흐린 주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