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허난설헌(1563∼1589, 강릉)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36

허난설헌(1563∼1589, 강릉)

 

  난설헌은 강릉(옛 지명은 임영(臨瀛)) 초당리에서 아버지 허엽(許曄)과 어머니 김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난설헌이라는 호의 유래는 직접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고 다만 난초(蘭)의 이미지와 눈(雪)의 이미지에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부친 허엽(1517 - 1580)은 경상감사를 역임하였고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난설헌보다 15세 위였던 큰오빠 허성(許筬, 1548 - 1612)은 이조·병조판서까지 지냈다. 작은오빠 허봉(許봉, 1551 - 1588)은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강직한 성격으로 임금에게 직언을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허봉은 1583년, 난설헌 21세 때 율곡 이이의 잘못을 탄핵하다가 귀양 갔다가 3년 후 방면되지만 불우하게 지내다가 술에 의해 몸을 망쳐서 난설헌 26세 때 객사했다. 그는 난설헌보다 12세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난설헌의 재능을 아껴주었다.

  동생 허균(許筠, 1569 - 1618)은 난설헌보다 여섯 살 아래로서 형조·예조판서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아주 총명하고 지식이 막힘이 없었으며 개혁의식이 뚜렷했다. 허균은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자이며, 후일 혁명을 준비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50세에 처형당했다. 간단히 말해서 봉, 난설헌, 균은 모두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모두 불행하게 죽었다.

  난설헌은 작은오빠 봉, 동생 균과 같이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건천동에서 장성했고 결혼 생활도 서울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난설헌은 문장을 집안에서 배웠다. 일찍부터 글을 깨우쳤다.

  작은오빠 허봉은 자기의 글벗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난설헌이 글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달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는데 서얼로 태어났기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상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당시 풍의 글을 썼다. 난설헌은 이달에게서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난설헌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14세나 15세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안동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이었다. 그의 집안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김성립은 허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다. 그는 나름대로 문장을 했지만 난설헌의 경지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던 것 같다.

 그는 공부에 그다지 뜻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1589년(선조 22), 즉 난설헌이 죽던 해, 자기 나이 28세가 되어서야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후처로 남양홍씨(南陽洪氏)를 맞아들였다. 난설헌이 죽고 3년 후인 그의 나이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으로 싸우다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벼슬은 정9품의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었다. 시체를 찾지 못해 의복으로만 장례를 치르었다. 그는 자식이 없이 죽어서 집안에서 양자를 들였다.

  난설헌의 외모는 뛰어났고, 성품도 어질었다고 한다. 난설헌은 아주 많은 책을 읽었고, 아주 많은 작품을 썼다. 글을 쓸 때에도 생각이 마치 샘솟듯 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고부간 갈등도 심했던 것 같다.

  1580년 2월(난설헌 18세),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사망했다. 이때부터 허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다.

 작은오빠 허봉은 시집간 누이동생인 난설헌을 아껴서 시도 지어 보내고 붓도 선물하였다.  강직한 성격의 허봉은 1583년(난설헌 21세)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1588년 9월(난설헌 26세), 금강산에 있던 작은오빠 허봉이 황달과 폐병으로, 향년 38세의 나이로 객사를 한다.

  난설헌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었다. 그러나 딸을 먼저 잃고 다음 해에 아들을 잃었다. 이들이 태어나고 죽은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희윤의 묘비명을 허봉이 지어준 것을 보면 모두 허봉이 귀양(난설헌 21세 때) 가기 전의 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난설헌은 몰락해 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아픔, 부부간의 우애가 좋지 못함과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등을 창작으로 승화시켰음에 틀림없다.

   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허균의 《학산초담》과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난설헌이 일찌기 꿈에 월궁(月宮)에 이르렀더니, 월황(月皇)이 운(韻)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경진 역)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라고 하였고,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낱낱이 상상되므로 "몽유기(夢遊記)"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 세월과 같다.

  난설헌은 그렇게 1589년 3월 19일,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그녀에게는 세가지 한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김성립과 같은 사부와 결혼한 것이 그것인데 이는 그녀의 파란 만장한 생애와 작품 성향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다음은 '황진이 vs 허난설헌'에 대한 깁갑동 교수의 글이다.

[황진이와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작품성이나 완성도에서 쌍벽을 이룬다. 두 시인 모두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판이하게 다른 환경과 삶의 행로를 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세계는 독자성을 지녀 극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황진이는 남성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을 읊었고,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한과 설움을 토해냈다.

  허난설헌은 1563년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상감사를 지낸 허엽이 아버지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동생이다. 좋은 집안 출신인 데 비해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결혼이 불행의 단초를 제공했다.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성 에 안 찼는지 바람을 자주 피웠다. 벼슬길에 나간 뒤로는 바람기가 더욱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와 불화까지 겹쳤다.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허난설헌은 뒤뜰 초당 한켠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동경해 마지않는 생활을 글로 옮겼다.

 

 “이윽고 돋은 달이 호수로 비쳐드니/ 연 캐던 조각배는 밤으로만 돌아오네/ 저 배야 기슭으로는 들지 마라/ 단잠 든 원앙이 놀라 날겠다”

  남편의 외도로 서러워진 허난설헌의 마음을 그나마 달래주던 건 아이들. 허난설헌은 강보에 싸인 그 아이들마저 하나하나 저승사자 품에 안겨줬다. 자식 잃은 어미의 심정은 눈물조차 겉으로 드러내지 못 할 만큼 한스럽다.

 

“작년에 딸을 잃고/ 올해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디 슬프게 땅에 묻으니/ 두 무덤이 마주 서 있네/ 백양나무 숲에서는 쓸쓸한 바람이 일고/ 소나무 숲에서는 도깨비불이 번쩍이네/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불러/ 무덤 위에 술을 붓는다/ 나는 안다, 너희 남매의 혼이/ 밤마다 서로 같이 노는 것을/ 내 비록 뱃속에 또 한 아이 있지만 어찌 가히 잘 자라기를 바라겠는가/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를 부르고/ 피눈물 흘리며 슬픈 소리 삼킨다”

 

  불행은 허난설헌 곁을 떠나지 않았다. 친정이 당쟁에 휘말려 풍비박산 났다. 오빠 허봉은 함경북도 갑산으로, 동생 허균은 남쪽으로 귀양을 갔다. 5년 만에 귀양에서 풀렸으나 곧바로 과음과 화병이 겹쳐 폐병으로 죽어간 허봉을 귀양지로 떠나보내는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강물은 가을 되어 잔잔하고/ 구름은 석양에 막혔구나/ 서릿바람에 기러기 울고 가니/ 차마차마 떠나지 못하네”

 

  황진이는 허난설헌과 달리 남자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에게 사랑을 쏟아부은 이들은 주로 사회적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황진이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 나눈 사랑. 두 사람은 애초 30일을 기한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날을 채운 뒤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 한 수로 발걸음을 잡아맸다.

 

 “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차거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 있네/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사람은 취하여 술잔을 거듭하네/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를 닮아 차가웁고/ 피리 부는 코끝에 매화 향기 가득하도다/ 내일 아침 이별한 뒤에는/ 우리들의 그리움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라”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도려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거든 구비구비 펼치리라”

 

  기다림의 극치를 노래하고 있다. 길고도 긴 겨울밤에 잠까지 설쳐가며 님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애틋하기 그지없다.

  황진이는 뭇사내들을 시험하는 쪽으로 애정행각을 넓혔다. 그의 미모와 자태, 재능에 내로라하던 사대부나 문사들도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송도 근처 깊은 산속 암자에 생불이라 일컫는 거사가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지족선사(知足禪師)라 불렀다. 하지만 30년 동안 수도한 그의 법력도 황진이 앞에선 맥을 못췄다. 황진이의 유혹에 그는 결국 파계를 하고 말았다.

  왕족이던 벽계수도 같은 꼴을 당했다. 송도에 와서 자신의 의젓함을 뽐내던 그는 황진이를 보고도 모른 척 스쳐 지나갔다. 황진이는 시 한 수를 읊조렸고, 벽계수는 밝은 달밤에 낭랑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말대로 벽계수는 송도에 머물며 짙은 사랑을 맛봤다. 황진이의 자신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대 제일의 학자인 화담 서경덕 을 찾아나섰다. 화담은 황진이의 온갖 교태와 아양에 그저 웃음만 지었다. 황진이는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화담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松都 三絶)의 하나이십니다.” 화담이 나머지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하나는 박연폭포요, 다른 하나는 접니다”라고 당당히 답했다. 그 뒤로 이들 셋은 고려 왕도였던 송악에서 가장 빼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황진이는 박연폭포를 송도 3절 중 하나로 평가할 정도로 자연에 애착을 가졌다. 여기저기 풍광이 뛰어난 곳을 찾아다니며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박연폭포에 대한 시상은 여장부의 면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치 박연폭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 큼 묘사가 사실적이기도 하다.

 

 “한 가닥 긴 물구비가 골짜기 틈에서 뿜어져나와/ 흉흉한 물결은 백 길의 용늪을 이루고/ 거꾸로 쏟아져내리는 샘이 구름인가 싶다/ 성난 폭포 비꼈으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우박과 천둥소리 마을까지 넘치고/ 구슬방아에서 옥이 부서져 허공에 치솟는다/ 구경꾼들아 말하지 마오 여산의 승경이 좋다고/ 알거라 해동의 제일은 이 천마산임을”

 

  황진이가 명사들과 사랑을 탐닉하며 자연을 노래한 데 비해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고된 삶에 눈을 돌렸다. 자신의 불행을 이타심 배양에 활용한 셈이다. 동병상린은 〈빈녀음(貧女吟)〉에 잘 드러나 있다.

 

 “손에 가위를 잡느라/ 추운 밤 열 손가락이 어네/ 남들 위해 시집갈 옷 지으면서/ 해가 거듭 돌아와도 혼자만 지내네”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작중 인물은 허난설헌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붉은 비단 너머로 등잔불 붉은데/ 꿈 깨보니 비단이불의 한켠이 비었네/ 찬서리 옥초롱엔 앵무만 속삭이고/ 뜰 앞에 우수수 서풍에 오동잎 지네”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서일까. 허난설헌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뭇남성을 사랑하고 울렸던 황진이도 30대 중반에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다. 스쳐 지나간 사랑의 추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 다시 오지 아니 하더이다”

  사람도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으면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인생살이를 황진이 역시 40도 채 안 된 나이에 마감했다.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인가? 무엇을 해야 행복을 얻을 것인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드는 의문이다. 황진이와 허난설헌, 두 여인의 생애와 시세계는 이 같은 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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