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1569∼1618, 강원도 강릉)
강릉 경포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으로 좀 올라가면 사천해수욕장이 있는 사천면 사천진리에 조그마한 야산이 있고 그 산 봉우리 숲속에 애일당(愛日堂)터라고 불리는 허균(許筠) 남매의 생가터가 있다.
허균은 호를 교산, 성수, 성성옹, 백월거사라 하였는데, 경상감사 허엽(許曄)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큰누나와 맏형 성(筬)은 이복(異腹) 형제이며, 둘째 형 봉과 둘째 누나 난설헌은 당대에 문명을 떨친 문인이었다.
부친 초당 혀엽은 소년기에 화담 서경덕 밑에서 수학했으며, 당시의 선비들 사이에 이름이 높았다. 명종 원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선조 대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라질 때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우두머리가 되어 활약했다.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병을 얻어 사퇴하고, 얼마 후 상주 객관에서 64세로 사망했다. 이때, 허균의 나이 12살이었다.
허균의 맏형 허성(1548~1612)은 허균보다 22세나 위이다. 허균의 둘째 형 허봉(1551~88)은 허균과 18세의 나이 차이가 있다. 형 허성과 함께 유희춘의 문인이며, 대과에는 형보다 11년이나 앞서 급제한 수재였다. 부수찬, 교리, 창원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이때, 부친과 형의 뜻을 받들어 동인의 활동을 도왔는데, 이이의 죄를 논하다가 당쟁에 휘말리었고, 급기야 함경도 변방지역으로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허봉은 다시는 관직을 마다하고 산수를 벗삼아 유랑하다가 금강산에서 38세의 나이로 객사했다.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문인으로 이름이 났었지만 2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허균이 그의 인생을 남달리 산 이면에는 위와 같은 가정환경 못지 않게 서자 출신인 손곡 이달(허봉의 친구)에게서 수학했다는 사실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서자들과 친분을 많이 갖게 되고 나아가 그들에 대한 사회 제약적 부당성과 슬픈 호소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허균은 누나 난설헌이 사망한 해인, 21세 때 생원 시에 급제하였고, 선조 30년 4월 9일, 그의 나이 29세로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지만 한양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 6개월 만에 파직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1604년 수안군수를 지내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계속 불교에 몰두하였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을 높이 평가받고, 그에게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세번째로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의 학식을 높게 평가하던 조정은 그를 다시 공주목사로 기용하는데, 이번에는 서얼 출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관직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또 다시 네번째 파직을 당하게 된다. 파직당한 뒤 그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기생 계생을 만나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함께 지냈고,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과도 교분을 쌓아 인간 관계의 폭을 넓혔다. 그러다가 1609년 명나라 책봉사가 오자 종사관이 되어 영접했으며,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하지만 1610년에 있었던 과거에 시험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그 뒤 1613년 영창대군을 죽인 계축옥사와 관련하여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 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에 가담했다.
광해군의 신임이 두터워져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좌참찬이 되어 이이첨과 함께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해 성사시킨다.
그러나 이 즈음 허균은 그 동안 자신이 모아온 세력을 바탕으로 반역을 도모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는 서얼 차별을 없앨 뿐 아니라 신분 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이 혁명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우선 한성을 장악할 것을 결심하고 수하들을 시켜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소문의 내용은 '북방의 오랑캐(여진족)들이 쳐들어 왔고, 남쪽에서 왜구가 쳐들어와 남쪽 섬을 점령하고 대군을 상륙시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점차 민간 속으로 파고들어 효력을 발휘하자 그는 남대문에 이 내용을 붙이게 하였다. 남대문에 전란에 관한 방이 나붙자 장안은 온통 전쟁 분위기에 사로잡혀 도성민들 중에는 황급히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허균은 민심의 동요가 더욱 심해지면 그 틈을 노려 한성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 계획은 엉뚱한 곳에서 탄로나고 말았다. 1618년 8월 그의 부하 현응민이 도성을 출입하다가 불심 검문에 걸려 거사 계획을 발설한 것이다. 현응민으로부터 모반 계획을 파악한 이이첨은 군사를 이끌고 허균의 집을 내사하여 그와 반란 핵심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리고 허균을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에 처했다. 이로써 20년 가까이 준비해온 혁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50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허균의 세력이 날로 커 가는 것에 위협을 느낀 이이첨이 허균에게 역모의 죄를 씌웠다는 설이 있다.
그는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폐모론에 동조했고, 서류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유자로서 불교를 신봉했고, 기생들과 자주 어울렸으며, 마지막에는 역모의 죄로 처형을 당했기 때문에 사가들로부터 경박자(사람됨이 경망스럽고 버릇이 없으며 예의범절을 지킬 줄 모른다)란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재능은 호평을 받았는데, 이식(李植)은 허균의 시를 바라보는 안목을 칭찬했으며, 김만중은 허균을 재주와 글을 높게 평가했다. 허균은 당대의 주자학적 문학관에서 탈피하여 정감과 개성의 세계를 중시했고, 특히 성당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저서로는 그의 시문집을 엮어 만든 《성소부부고》가 있다. 어머니가 천하거나 개가했다고 해서 그 자손의 벼슬길을 막아 놓는 당시의 제도를 비판한 <유재론>이나 위정자가 정치를 잘못하면 호민이 나와 무도한 자를 죽이게 된다는 내용을 담은 <호민론>은 허균의 사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과연 허균은 역적인가. 그를 평한 사람의 기록들은 크게 두가지로 묶어진다. 문장이 뛰어나다는 것과 경망하다는 것이다. 문장이 뛰어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평이며, 경망하다는 것은 그를 비난하는 편에서 평한 것이다. 경망하다는 데에서 좀 더 나아가면, 상중에는 기생을 끼고 놀았으며 부처를 믿었다는 데까지 이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난은 유교의 테두리를 전제로 할 때에만 성립이 된다. 천주교를 들여와서 처음으로 믿었다는 것도 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유교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상을 입으면서 기생을 가까이 할 수도 있는 일이고, 부처를 믿을 수도 있는 일이다. 남녀간의 정욕과 본능을 공자의 가르침보다 귀하게 여길 수도 있다.
허균의 죄는 남들보다 앞서서 시대를 살았다는 죄이다. 그는 자기가 하는 행동이 떳떳했기에, 기생과 잠을 잔 날에는 일기에다 그의 이름까지도 밝혔다. 남들이 읽는다고 해서 감추지를 않았다. 경망하다고 비난하기 전에, 솔직하다고 이해해줘야 할 것이다. 자기들이 다 지키는 사회의 규칙을 그가 깨뜨렸다고 해서 유학자들은 그를 비난했지만, 이 규칙을 깨뜨려야만 시대를 앞서 가는 혁명가나 선각자가 될 수 있다.
자기의 몸이 세상에 맞지 않자, 자기를 세상에 맞게 고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에게 맞도록 고치려고 했다. 그는 자기의 혁명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광해군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폐비론을 주창하였으며, 한편으론 사회구조에 불만을 느낀 서얼들을 지원하였다.
허균의 혁명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홍길동전」은 당대에만 하더라도 누구의 저작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보다 18세 아래인 이식이 그의 「택당지」 잡저 부분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기록한 것을 통해 후대에 밝혀졌을 뿐이다.
'문인 일화(ㅈ-ㅎ)'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지상(?-1135, 서경) (0) | 2010.10.16 |
---|---|
홍랑(?-1599, 함경도 홍원) (0) | 2010.08.30 |
허난설헌(1563∼1589, 강릉) (0) | 2010.08.30 |
황지우(1952- , 전남 해남) (0) | 2010.08.30 |
황동규(1938-, 평남 영유) (0) | 2010.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