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홍랑(?-1599, 함경도 홍원)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40

홍랑(?-1599, 함경도 홍원)

아래는 장봉혁의 글이다.

[최경창(1539-1583, 전남 영암)은 본관이 해주로 호가 고죽(孤竹)이다.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율곡, 송익필 등과 함께 팔 문장으로 불리었다.  당나라의 시문에도 능하여 삼당파(三唐派)의 한사람이기도 하였다. 삼당파 라는 것은 조선 선조 때의 최경창 ·백광훈 ·이달 세 시인을 일컫는 말로 고려시대 이래 한국의 시인들이 대개 중국 송나라의 소동파 ·황산곡 등의 시를 배워왔는데, 이 세 사람은 당나라의 시문을 배우는데 힘을 기울여 성공하였다.

고죽은 1568년(선조 1) 수물 아홉 나이에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그 5 년 후인 34세 되던 해인 1573년(선조 6)에 함경북도의 북도평사로 부임하면서 홍랑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북도평사(北道評事)란 조선의 정 6 품의 외직 문관으로. 병마절도사 밑에서 일하는 벼슬이었다. 본래 이름은 병마평사(兵馬評事)이고 약칭으로 북평사, 평사이다. 그 임무는 병마절도사를 도와 도내 순행과 군사훈련, 무기 제작과 정비, 군사들의 군장 점검, 군사시설 수축 등의 임무를 대신하였으며 병마절도사 유고시에 그 임무를 대행하였다. 이는 변방에 무신 수령이 많이 임명되고 병마절도사의 권한이 막중하여 문신관료가 보좌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경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함경북도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기생의 출신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은 아무나 쉽사리 꺽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가지나 담장 및의 꽃을 의미하는 노류장화(路柳墻花)에 머물지 않았다. 교방(敎坊)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단련하면서도 문장과 서화 등의 기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잘 다듬어진 예기(藝妓) 홍랑 이었다.  그래서 홍랑은 관아의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고 미색을 흘리는 여느 기생과는 달리, 그 품성과 재주가 남달랐다.

그 문학적 소양과 재주는 이미 양반 사대부나 유명한 시인가객들에 뒤지지 않았으며,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며 몸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자들의 유혹은 도를 더해갔으나 홍랑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최경창이 북도평사로  함경도의 경성에 나타나면서 서로 만나게 되면서 세세토록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예기 홍랑의 뛰어난 가무솜씨와 시문의 능력에 짝이 될 만 한 사람이 바로 최경창 이었다.

최경창 또한 탁월한 문장가인데다, 어릴 적 영암에서 노략질하는 왜병들에게 피리를 불어 왜병들이 감탄을 하며 물러나게 할 절도로  음률을 잘 알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 또한 뛰어났던 인물이었는데, 북평사로 부임하면서 서로 정신적으로 상대할만한 짝을 만나게 된 것이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예로부터 국방의 요지로 취급되는 대단히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은 이미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 중의 오지인 함경도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과 함경도 경성의 최고 예기(藝妓)였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기였기 때문에 관리와 만나는 일은 매우 자유로웠을 것인데, 홀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우선 정신적으로 딱 맞는 동료이자 짙고 은밀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처지가 되어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 한 몸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최경창의 남긴 기록에 의하면 결국 홍랑은 최경창과 동행하여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부부처럼 정을 쌓아가며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오고 말았다.  중앙정부의 부름을 받은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법으로 강력히 구속당하고 있어서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별을 눈앞에 둔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배웅하며 경성에서 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함관령 고개를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홍랑,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산자락 길옆에 서 있는 산버들이었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에 다가간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정표인양 건네주며 구슬프게 연정가인 시조 한 수를 읊었다.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산비탈에서 자라고 있는 버들가지를 꺾어 정표로 준 홍랑의 기발한 생각을 고죽인들 왜 모르겠는가. 버들가지란 잎이 시들었다가도 땅에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나무인 것을.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항상 님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다는 것을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홍랑은 고죽과의 이별 이후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 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은 풍문을 타고 멀고 먼 함경도 경성의 홍랑의 귀에까지도 들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홍랑의 가슴은 애절하기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다. 최경창의 기록에 의하면 "칠 주야 동안 쉬지 않고 찾아왔다" 하였다. 거의 2년 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그 결과 최경창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차츰 회복되어 갔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양계의 금이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결국 최경창은 당쟁의 세력다툼이 치열한 당시 사회의 표적이 되어 파직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때는 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 왕후가 돌아가신 지 1년이 채 안 된 국상 중이라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별의 시간을 맞이하여 고죽은 홍랑에게 애절한 시 한 수를 읊어 주었다. 시의 내용을 뜯어 살피면 이보다 더 애절할 수가 없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

              마음속 정감이 고동 치지만 그윽한 난(蘭)님을 보내오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 

              이제 가면 아득히 먼 곳 어느 날에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

              함관령 옛날의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마오.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길 어둡겠지.


홍랑은 고죽에게 그윽한 향을 풍기는 난(蘭)과 같은 존재였다. 시문의 첫 연에 맥맥(脈脈)이란 "서로 말 없이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정감이 고동치는 모양"을 표현한 말이다. 그들은 이번의 이별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슬픈 일화만 남기고 만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바로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이후 복직이 되어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곧 바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마땅히 없을 것이란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사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사리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특히 다른 남정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고 살았다. 고생은 그뿐이 아니었다. 고죽의 묘소가 한강 하류 인근이라 겨울이 되면 차가운 강바람도 참아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하여 3년을 지나고, 차마 떠날 수 없어 수년 동안의 시묘사리를 계속하였다.


근 10여 년 동안의 시묘 사리를 마친 뒤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 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홍랑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그 즉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전 국토가 황폐화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고죽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청석초등학교 북편 산자락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고죽 최경창의 묘소와 그녀의 무덤이 있다. 1969년 6원에는 홍랑의 묘비를 세우며 비제(碑題)를 <詩人洪娘之墓>라 하고 고죽의 15 대손 태호씨가 비문을 찬 하였다. 홍랑의 묘소 아래에는 1981년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의 화원 50여명이 추렴하여 세운 홍랑가비(洪娘歌 碑)가 서있다

그러나 홍랑의 애절한 가비가 서있는 이 묘역은 개발이라는 시대적 변화의 물결을 타고 불원간 다른 곳으로 옮겨 저야 할 처지이다. 고죽의 후손들이 파주는 물론이고, 전남 영암, 경기 안성 등지에 살고 있는데 서로 자기네 사는 곳으로 이장하려 하고 있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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