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영화)

취화선

톰소여와허크 2010. 8. 31. 10:20

글 작성 시각 : 2002.06.13 23:03:22

장승업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림을 그릴 때였다. 술을 사발로 들이키면서 그림에 열중해 있을 때였다. 술은 자신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술이 정상적인 삶-적당한 부와 지위를 가지고 아내를 데리고 자식을 키우는-을 가로막고 생명을 갉아먹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술로 인해 자신의 천재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면 기꺼이 취하고, 취하기 위해 깨어있는 삶을 살아도 좋으리라.
[서편제]에서 '괜찮은 소리'를 위해 소리꾼이 길로 나섰듯이, 장승업도 '달라진 그림'을 위해서 길로 떠나 길로 돌아오고 또 떠난다.
길의 끝에서 장승업은 도자기에 새겨진 자기 그림을 향해 가마 속 불길로 들어간다. 불타는 예술혼의 표현이라 하겠으나, 다분히 작위적인 면이 있다. 그냥 길 위에 쓰러져 얼어죽거나 취해 죽거나 굶어죽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훨씬 더 장승업답다고 하겠다.
어쨌든 더 이상 떠날 수 없을 때 인간은 절망하는 법이다. 절망의 끝은 희망의 시작이란 점에서 절망은 희망적이다. 하지만 달라질 욕구도 떠날 용기도 없는 자에게 주어진 희망은 절망적이다.
고갱이 가족과 직장을 버리고 타히티 섬으로 가는 차표를 끊는 것과, 장승업이 임금과 후원자들의 기대를 버리고 뛰쳐나온 것은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본다. 예술은 얽매임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고자 했는가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승업은 항변하다(사실은 김용옥과 임권택의 항변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만). 왜, 서민들의 질기고 소박한 삶을 담아내지 않느냐는 질책에 그림은 그림일 뿐이라고 그랬다. 예술지상주의자의 면을 내보인 것이다. 그림은 그림을 뿐이다. 사실, 그럴까. 장승업의 그림을 보고 싶다.

'감상글(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아시스  (0) 2010.08.31
라이터를 켜라  (0) 2010.08.31
봄날은 간다  (0) 2010.08.31
'천국의 아이들'과 '북경 자전거'  (0) 2010.08.31
슈렉  (0) 2010.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