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 시각 : 2003.08.31 20:42:53
김탁환, <방각본 살인사건>상. 하, 황금가지, 2003
어릴 때 추리소설에 탐닉한 적이 있었다. 명탐정 홈즈와 괴도 루팡의 이야기에 설레던 시절, 그 때를 생각하며 역사추리소설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책을 골랐다. 평상시보다 빠른 속도로 상하 두 권을 읽었다.
때는 정조가 재위하던 시절이다. 한양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졌고, 의금부도사 이명방이 살인범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과정에서 백탑파 서생(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 백동수, 김진 등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는다.
살인사건 조사가 진행되면서 당대 최고의 소설가 청운몽이 죄를 자백하고 죽었다. 그럼에도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은 이어졌고, 결국 청운몽의 동생 청운병이 범행 현장에서 잡혔다. 그리고 청운병 뒤에 조정 대신들의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음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사건의 파장은 커져만 갔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원칙론자 이명방과 재주꾼 김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증인들이 연이어 암살되거나 자살함으로써 사건은 미해결로 종료된다.
사건의 밑그림은 권력을 가진 자(일부 조정대신)와 기회를 엿보는 자(백탑파) 사이의 갈등이다. 보이지 않는 세력으로서 살인사건을 유도했던 조정 대신들은 자기 반대파인 백탑파 서생을 제거하고자 했다. 백탑파 서생은 북학(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한 선진문물 도입)을 수용하고 북벌을 비판하는 진보 세력의 모임이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북벌의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하자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반면에, 보수파 조정 대신들은 북학이 청나라에 경도되어 자칫 청의 문화에 조선이 동화될 우려가 있다는 점, 사회 불만 세력이 자신의 울분을 해결하는 마당으로 정치를 어지럽힐 수 있다는 점, 또 그들이 자신의 입장에 맞지 않는 기득권 세력을 몰아내고 그들만의 당을 꿈꾼다는 점을 들어 백탑파 서생을 살인사건과 연루시켜 궁지로 몰아넣으려 했다.
작가는 현재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는 진보와 보수 세력의 다툼을 지켜보며 글을 꾸몄다고 했다. 등장인물을 통해 진보의 급진성과 보수의 안일성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으나,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을 아끼고 있다. 다만, 지도자의 모델로 정조를 생각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정조는 보수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보 세력을 등용했으며, 또 경우에 따라서는 진보 세력에게 가해지는 칼날을 모른 체하기도 했다. 어느 쪽도 손들어주지 않는 어정쩡한 태도로 둘을 다 거느리고 조정하는 것이 지도자의 처신이란다.
하지만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지도자가 한 번 늦추면 그 동안 쌓아놓은 개혁이 물거품이 되기도 하고, 한 번 서두르면 그 동안 공들인 안정이 엉망이 되기도 한다. 진보와 보수, 선택의 문제이든 실천의 문제이든 이래저래 어려운 것만은 틀림없다.
정조 재위 시, 소설을 불태운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소설이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는 이유였다. 만약 그 때 소설의 가치를 헤아려서 몰래 쓰고, 새기고, 팔고, 읽은 자가 있었다면, 그는 그 때 입장에서 범법자이겠으나, 지금의 입장에서 선구적 문화인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소설이 핍박받던 시절에 소설을 옹호하는 용기를 갖고 실천했다면, 그게 바로 진보의 길이라고 하겠다. 요컨대 긴 안목을 갖고, 제대로 된 선택을 하며, 거기에 책임질 줄 아는 자세가 진정한 '진보'임을 생각한다.
여름밤에 추리소설만큼 재미있는 게 있을까. 이 책으로 여름밤 더위를 잠시 잊었다. 다만, 역사추리소설에서 역사나 이념이 강조되면 추리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점이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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