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 시각 : 2004.02.19 16:27:06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가 있었다. 사내 형제를 전쟁 속에 다 잃고, 하나 남은 라이언 일병을 어머니 품에 돌려주기 위해 수많은 동료 전우들이 희생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내용전개였지만 전쟁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은 웬만큼 심어준 영화로 기억한다.
이번에 본 '태극기 휘날리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갖지 못한 강한 설득력과 진한 여운을 갖고 있었다. 내용 전개가 자연스럽고, 거침없고, 깔끔했다. 사건을 격정적으로 다루면서도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전달해준다는 느낌이었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악마가 될 수도 있다는 형이 있었다. 실제로 전쟁이 그로 하여금 악마가 되게 했다. 형에게 전쟁의 명분은 중요치 않았다. 오직 동생이 무사히 귀가하게끔 하는 데 전 인생의 목표가 있는 듯했다.
반면에 동생은 형을 사랑하면서도 전쟁광이 돼버린 형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자신에게 한없이 선량한 형이 상대편에게 왜 그렇게 가학적으로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형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교차되는 내적인 갈등에 빠지게 된다.
형의 돌연한 변화는 전쟁 영웅이 되려는 공명심이거나 인간 내면 깊숙이 잠재된 파괴 본능의 도출로도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동생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형의 마지막 모습은 독자의 이해가 그릇되었음을 시사한다.
국방군과 인민군으로 만난 형과 아우, 이들의 불행은 그 시대를 살았던 모두의 불행이었다. 이념과 노선이 다른 일부 강대국과 몇몇 지도자들에 의해서 전쟁은 발발한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념엔 아무 관심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념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린다.
전쟁은 적과 동지, 둘 중에 하나를 강요한다. 선택을 피할 수 없게끔 해놓고, 밀고 밀리는 전선에서 어느 한 쪽 편에 섰다는 이유로, 어느 한 쪽 편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량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간다. 그러는 중에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분노를 만들고 더 잔인한 앙갚음으로 보상하려 한다. 그러니 모두가 미치광이가 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생각하면, 내가 왜 죽이고, 왜 죽어야 하는지를 모른 체 벌이는 싸움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희극이자 비극인 셈이다. 그 희극과 비극의 정점에 형제의 슬픈 운명이 놓여 있다.
휘날리는 태극기엔, 어쩌면 피의 얼룩과 죽음의 함성이 배여 있을지도 모른다. 휘날리는 태극기는 위태롭고 불안하고 슬픈 우리 시대의 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