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에 대한 명상>수록작

정든 골목

톰소여와허크 2010. 9. 2. 11:14

 

 

정든 골목 / 이동훈

  

  
골목 끝집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아부지, 문패로 걸려 있다.
허줄한 궁상답지 않게
수챗구멍에도 맑은 물이 돌기를 바라는
아부지, 골목은 언제든 말쑥하다.
한때 갑갑증 치밀어 뛰쳐나갔다가
이젠 주말마다 찾게 되는 그 골목.
대문 안쪽에 먼산바라기 된
아부지, 인기척을 듣고야 깬다.
대문 옥상엔 빨래가 마르고 있고
할매가 된 늙다리 장미는
골목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저녁이면 아부지,
대문께 구부정하니 앉아
골목을 내다보던 더운 눈을 추억한다.
서럽게 나이 먹은 골목에  
시집 간 누이가 드문드문 다녀가고
대문 앞에 서 있던 누군가는
망설이다가 돌아가기도 했을 것이다.
세월 지나 장미 삭정이가 부스러져 나가듯
하나 둘 골목을 빠져나가고 혼자 남은
아부지, 무화과나무 되어
해마다 질척거리고 있다.

* 무화과나무가 있는 집은 와글거리는 골목이 있어서 외롭지 않겠다. 그 골목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사계절 내내 푸르디푸른 잎사귀를 움켜쥐고 꼬리를 감춘 그늘들이 박혀 있기 때문이리라. 계절이 바뀌면서 세차게 불어오는 도시의 매캐한 바람에도 끄떡없이 쓸리지 않는 질기디 질긴 투명가죽을 입고 있어서일까? 아부지의 깔끔한 성미를 알아차린 것일까? 사라질 수 없는 깊은 사연들이 담벼락 너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내면의 어느 계곡 한 채가 먼 미래의 대로에 달려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잠재해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목숨이었던 자식들이 무사히 장성해 출가 하고 나면 골목은 날마다 허전하다. 가족모임이 뜸해질 때도 골목은 어김없이 햇살을 쌓았다가 허무는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구름이 되어가도 여전히 푸른 광장이고 싶은 것이 우리의 아부지들이다. 텁텁한 바람으로 파도를 만들어 어제의 실수를 자근자근 밟기도 하는 자신의 유년을 생각하며 가끔 미소를 짓기도 한다. 시집 간 누나의 발자국이 그립다. 나도 이렇게 누나가 그리운데 늙은 골목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나 이별은 온다. 만남 후 이별이 있듯 그 이별을 얼마나 정겹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만남도 특별할 것이다. 지나가버린 시간들이 고스란히 박혀 있는 포근한 골목에 눕고 싶은 시간이다. 그 시간들이 가시를 달고 있을지라도 그 골목 안에 편히 눕고 싶은 밤이다, 이별인 지점은 곧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다는 발칙한 상상을 하면서.(이강하 시인)


  얼마전 샛노란 개나리색 표지가 이쁜 시집 한 권을 받았다. 이동훈 시인의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이다. 해학적이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내면 깊은 곳의 사유와 이동훈 시인 특유의 상상력은 내 마음을 훔쳐가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정든 골목]이라는 시 한 편을 소개하기로 하자. 아부지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내어 골목 풍경과 잘 어울어지게 버무린 이 시는 마치 오래 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처럼 따스하고 정겹다. 
  활자 하나 하나가 그대로 그림이 되어 지나간다. 
  아버지, 아니 아부지가 슬그머니 마음 속에 다녀 가신다.(곽도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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