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일화

김환기(1913-1974, 전남 신안군)

톰소여와허크 2010. 9. 4. 11:54

김환기(1913-1974, 전남 신안군)

 

 김환기는 1913년 2월 전남 신안군의 기좌도에서 출생했다. 부친 김상현 씨는 거의 천 석 가까운 수확을 하는 지주였다. 가야금 연주가 수준급이었으며 엽총 사냥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고향 국민학교를 졸업한 김환기는 곧장 서울의 중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유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지닌 남서해의 한 섬에서 서울로 유학 가는 길이 그다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상상에도 불구하고 김환기가 그 유학에 어떤 어려움을 느꼈다는 기록들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가 일제 치하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경제적 여유가 김환기의 성격에 유형 무형의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생각 또한 어렵지 않다.  

 산, 달, 매화, 사슴, 여인, 새, 항아리…. 확실히 그가 즐겨 그린 소재들은 한국적이며, 본질적으로는 동양적이다. 그 중에서도 그가 특히 애착을 가진 것은 이조백자라고 알려져 있다. 이조백자에 대한 그의 열정은 거의 광적이어서 일제 말인 1944년부터 육이오가 나기 직전까지 거의 매일 한 점씩의 도자기를 구입해 들였다 한다. 이를테면 이조백자를 그에게 있어 '꽃이 존재하기 전의 꽃의 모습' 같은 것이었다.

 "조형의 미를, 민족을 나는 도자기에서 배웠다. 지금도 교과서는 바로 우리 도자기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는 것이 여인이든 산이든 새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도자기에서 오는 것들이요, 빛깔 또한 그러하다."

 이조백자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환기의 데뷔작은 '이과회'에서 응모하여 입선한 <종달새 노래할 때>(1953)로 알려져 있다. 1938년에 김환기는 동경 자유미술가협회전에 <론도>라는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이되는 과도기의 작품으로 해석되는 이 작품은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한 원조로 기억되며, 유럽화가들의 기계적이며 기하학적인 추상 기법에 비하여 훨씬 동양정신에 근접해 있다는 후대 평론가들의 후한 평판을 얻게 된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김환기의 작품은 어느 도록에도 실려 있지 않다. 아니, 세계의 어는 전장 속에서도 추상 미술이 꽃을 피웠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실존이었으며 그 극한이었다. 이 기간 중 김환기가 이뤄낸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혼과 재혼이었다. 42년 그는 첫부인과 이혼을 하며, 44년 수필가 김향안 씨(한때 이상의 부인)와 재혼을 하게 된다.

 김환기에게 해방 공간은 행운의 시점으로 다가온다. 옛주둔군의 수도에 유학한 이력들이 이제 빛나는 훈장으로 빛을 발하겓 되는 것이다. 그는 국립 서울대학의 미술학부의 강의를 맡게도 되고, 국전 심사 위원과 서울시 문화 위원 일을 보게도 된다. 이즈음 그는 유영국, 장욱진들과 함께 '신사실파'를 조직, 그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김환기의 고향에 있는 안좌 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 김병무 옹은 2회 졸업생인 김환기에 대한 몇 개의 또렷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팔망미인이었지. 그림, 글씨, 음악 다 좋아했어. 한번은 방학 때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연극공연을 했던 적도 있지. 장풍(長風)이란 제목이었는데 내용은 오래 돼 까먹었어. 환기가 중심이었지."

 같은 학교 3회 졸업생인 김진구 옹은 김환기의 사촌 조카인데 당시 김환기와 함께 서울과 동경 유학을 했다. 명치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인텔리인 그의 김환기에 대한 기억은구체적이었으며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중학 다닐 적에 한방을 둘이 같이 썼지. 바이올린을 늘상 켰는데 키가 육척이라 운동, 특히 농구를 잘 했어. 그림은 일본 유학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했는데 도고세이지와 후지다스쿠지의 영향을 받았지. 이 사람들 그림은 내가 보아도 뭔가 조금 통하는 게 있었는데 당시 김환기의 그림은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이었지. 아이들 장난 같은 그림이었는데 이중섭이와는 좀 달랐어. 중섭의 그림은 처음 본 사람도 친근감이 있거든.

 불란서 갔다 온 뒤에 전시회에 갔더니 그림이 참 좋아졌드만. 그때 하나 주라 했더니 안 주었어. 그 사람 그림 가진 사람 우리 주위에 한 사람도 없어. 주질 않았지. 돈 주고 사라고 해. 친척도 소용없었지. 그림은 그 당시도 비싸게 팔아 묵었어. 아주 독하게 비쌌지. 해방됙 전에 금강산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지. 미도파에서 전시회를 하고 내 방에 그 그림들을 쌓아 놓았는데 어떻게 해서 그 그림들이 다 없어지게 되었지. 지금도 숙모(김향안)가 찾으려 애를 쓴다는데 행방을 알 수 없어. 술을 잘 마셨지. 돈만 생기면 술을 마셔 버려. 남의 술은 절대 안 얻어 먹으려 했어. 자기가 다 내려 했지. 여자들에게는 참 인기가 좋았어. 소위 예술계 계통 여학생들은 모두 다 그를 좋아했어. 그림, 글, 인물, 음악, 다 뛰어나니 어디 좋아하지 않고 견디겠어? 예술회장 했던 조경희도 김환기를 썩 좋아했지."

 평론가들은 김환기의 작품에 고향 바다가 나타나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그것은 고향의 부재, 정신의 부재라고 비판한 친구들도 있었다. 지주 계층으로 일찍이 일본 유학의 혜택을 입은 김환기에게 어차피 고향이란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다 더 자유루온 예술의 세계를 꿈꾸었고, 파리와 뉴욕에서의 생활은 그 꿈의 현재적 실존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곽재구 기행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에서 발췌 인용했습니다.

 그의 점묘(點描)시리즈 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은 1970년 「제1회 한국미술 대상전」에서 대상을 탔다. 이 작품은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읽고 그린 것으로 국내에서 호평을 받았다.

 1963년 미국에 건너간 金煥基는 1974년 뇌출혈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그림 ‘무제’(1972년 작)는 국내 경매에서 3억9000만원에 낙찰됐다. 근현대미술작품의 국내 경매 사상 최고 액수였다. 한편 외국 경매에서는 박수근의 작품들이 3억∼4억원대에 팔리며 국내 작가 중 최고가를 형성해왔다. 박수근의 ‘절구질’은 1997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38만7500달러(약 4억3000만원)에 팔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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