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일화

김기창 (1914∼2001, 서울)

톰소여와허크 2010. 9. 4. 11:53

김기창 (1914∼2001, 서울)


  운보(雲甫) 김기창은 1914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나 승동보통학교에 다녔다. 그는 7살 때  장티푸스로 청신경이 마비되어 후천성 청각장애자가 되었다. 선생님의 강의를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공책에 사람, 새, 꽃, 나무, 산 등 생각나는 대로 그렸다. 어머니는 아들의 그림 소질을 인정하고 아들이 그림을 배울 수 있도록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김기창의 어머니는 감리교 신자로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개성의 정화여학교 교사를 지낸 바 있는 신여성이었다. 김기창이 김은호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한 것도 어머니의 배려 덕택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맡겼고 이당 사사 6개월 만에 김기창은 조선미술전에 출품하여 입선하는 성과를 거뒀다.

  ‘귀 먹고 말 못하는 18세 소년 화가’로 당시 신문들은 그를 크게 보도했고 이 때부터 매스컴은 그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선전에 입선하여 겨우 빛을 본 다음해에 타계한다.

  광복 후 아호 운포(雲圃 )에서 口자를 없애 자기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고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과 의지를 보여줬다.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의 삶이 김기창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헬렌 켈러는 운보에게 큰 힘을 주었다. 운보는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온 헬렌 켈러가 금강산을 여행하고 판소리를 감상한 뒤 정상인보다 더 즐거워하더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베토벤과 고야도 그가 예술의 거장으로 부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청각마비에 생활고까지 겪은 베토벤은 자살을 결심하고 `가을에 낙엽이 땅 위에 떨어지듯 내 희망도 사라졌다'는 내용의 유서를 썼으나 마침내 <제5교향곡 운명><제6교향곡 전원><제9교향곡 합창>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고야는 나이 46살에 청각을 잃은 그는 불타는 투혼으로 불운을 털고 일어나 <성 앤토니오 데 라 프로리다 성당의 천장화>, <마야>같은 대작을 만들어 인류문화사에 기여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를 돌봐준 분은 외할머니와 스승인 이당 그리고 부인인 우향 박래현이었다. 박래현은 그에게 구화를 가르쳤다. 운보-우향 부부는 평생 17번이나 부부전을 열 정도로 쉼 없이 그림을 그렸다. 평생의 동반자로 함께 했던 부인 박래현이 1976년 죽자 운보는 찢어지는 정신적 아픔을 겪었지만 이것을 광기어린 예술혼으로 승화시켰다.

  세필(細筆)에서 시작해 한국 산하의 정기를 수묵(水墨)의 농담(濃淡)과 단순한 색상으로 힘차게 그려낸 ‘청록산수’, 조선시대 민화의 정취와 익살을 대담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바보산수’를 거쳐 말년의 ‘걸레그림’에 이르기까지 실로 구상과 추상의 세계를 붓 가는 대로 넘나들었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바보란 덜된 것이며 예술은 끝이 없으니 완성된 예술은 없다. 그래서 바보산수를 그린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동생들과 헤어진 그는 제2차 남북이산가족상봉 때 북에서 온 동생 기만 씨와 50년 만에 병상 해후를 해 민족분단의 아픔을 또다시 실감케 한 바 있다.

  농아복지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운보는 80년대 중반 외가가 있던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운보의 집'을 세우고 그 옆에 운향미술관과 도예전시관, 운보공방 등 문화공간을 조성했다. 이중 운보공방은 농아들에게 도자기 기술을 가르쳐 자립기반을 닦도록 한 곳으로, 청각 장애인의 권익옹호에 앞장선 운보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듣지 못하면 울부짖고 싶고 아무거나 때려 부수고 싶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터질 듯한 가슴의 응어리들을 그림에 쏟았어요. 지금은 내 자신이 귀먹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때가 있어요. 귀가 들렸다면 오늘의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고통도 없지 않았지만 폐쇄된 소리의 공간이 있었기에 한 작업에 몰입, 집중할 수가 있었어요”

  이런 그도 친일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젊은 나이에 '선전'에 추천작가가 된 영광을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갚았다. 스승 김은호가 밟은 길을 따라 총독부의 전시 문예정책에 부역한 것이다. '조선남화연맹전'(1940. 10)과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 1)를 비롯하여 김규진, 김은호, 이상범, 이한복, 허백련 등 친일 미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기금마련 전람회에 적극 협력하였다.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도 앞장섰다. 이는 신문·잡지류의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게제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 8. 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완전군장의 [총후병사](1944. 4)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김기창은 일간지 기자와의 대담에서 친일의 변으로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물론 의지가 강한 자기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평범한 인간이면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겠지요”({경향신문}, 1991. 8.3)라고 피력한 바 있다.

  김기창은 향년 88세, 충북 청원군 북일면 형동리 ‘운보의 집’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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