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 허연
술 취해 집을 뛰쳐나간 아버지와
전화통 붙잡고 싸운 날
회사에선 시말서를 쓴다.
공교로운 것이 아니라 그게 사는 거다.
때맞춰 창밖 남산에 눈이 내리거나
옛 여인이 오랜만에 예수 믿으라는 전화를 걸어온다면
판단 안 서는 그 상황은 차라리 아름답다.
가장 축약된 문장으로 비겁한 시말서를 쓰고
삼거리 부대찌개를 먹고
담배를 반쯤 피우다 말고
다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
누워 있는 불상들이 일어나는 것만큼
삶이 호쾌해지는 건 힘든 일이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 어떤 일이 잘못 되어가는 상황을 머피의 법칙이라고 한다. 간만에 휴가를 내어 어디를 갔는데 그날 마침 행사가 있거나 사고가 있어서 차량 지체가 심하다든지, 날이 너무 추워 차 밖으로 나갈 엄두가 안 나는 일도 그런 경우이겠다. 속상한 마음에 불만스런 말들이 옆 사람에게 번져 나가면서 상황이 더욱 나쁜 쪽으로 빠지기도 한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일이 “공교로운 것이 아니라 그게 사는 거”란다.
사는 일이 다 이런 식이면 퍽 곤란하겠다 싶고, 꼭 그렇기만 하겠냐는 마음도 있지만 인생 여정에 나쁜 일들이 끼어들기 마련이고 더러 그 일이 일생을 좌우하기도 함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의 백미는 이해할 수 없는 옛 여인의 전화이다. 한 번의 전화가 한때 무겁고 진지했을 사랑을 아주 가볍고 유치한 것으로 바꾸는 데 일조한다. 사는 일은 또 그런 것이다. 무거워서 슬프고, 가벼워서 쓸쓸해지는 것이다. “삶이 호쾌해지는 건 힘든 일”인 줄 알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또한 사는 일이다. 시말서를 써서 회사에 내야 하고, 집 나간 아버지께 전화를 해야 한다. 이번 여행의 끝이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음 여행 계획을 세워야 한다.
사는 일은 ‘살아가는 일’과 ‘살아지는 일’의 더하기이다.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을 받아들여야 한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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