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불 김원룡님(1922-1993) 작
휴가/ 이동훈
여름휴가가 되면 읽을거리를 챙겨
산 아래 첫 번째 마을로 방 하나 얻어 가고 싶어.
별똥 지나는 밤이면
천장을 드나드는 생쥐 발소리와
벽지 안쪽으로 흙 부스러기 떨어지는 소리에
잠시 쉬어가며 추리소설을 독파할 거야.
햇볕 쨍한 낮이면
느티나무 그늘이 있는 쪽마루에 누울 거야.
싱거워진 추리물을 베개 삼고
구름 꽁지 따라 맴을 돌아도 좋겠지.
펌프로 냉수욕하는 호사는 바라지 않아.
끼니로 겉절이와 주먹밥만 거푸 준대도
군말 없이 고마울 거야.
아이가 좀만 크면 두말없이 떠나고 싶어.
뉴스도 잊고, 세금도 잊고, 식구도 잊고,
좀처럼 풀 수 없는 세상 미스터리도 다 잊고
얼마간 맹하게 늘어지고 싶은 거야.
이런 이야기를 너에겐 차마 할 순 없었어.
식구를 버려두고
여름 한 철, 크레인 위에서 농성 중인 너,
발단과 위기만 있는 소설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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