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 고영
벌건 대낮
술 취한 물뱀처럼 집을 찾아든다
그런데 집을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이놈의 집이 그새 허물이라도 벗었나?
너무 오래 집을 비워뒀던가, 집 비운 사이
집마저 나를 잊었던가
환장할 봄날에 취해 단체로 바람이라도 난 것인가
얼마나 더 취해야, 얼마나 더 검불처럼 떠돌아야
집은 모습을 드러낼 텐가
애당초 집을 짊어지고 나왔어야 했는가
놀이터 벤치도 그대로
수수꽃다리 향기도 다 그대로인데
집아, 너만 어디로 갔니?
회초리 같은 햇살에
볼기짝 맵게 얻어맞을 가엾은 마음을
길가에 눕혀두고
하릴없이 하늘에 삿대질이나 해대다가 문득,
서천(西天) 가장자리에 외롭게 뜬
초췌한 낮달을 본다
바보, 너도 집 잃어버렸지?
-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문학세계사, 2009.
* 자기 집이든 남의 집이든 집의 힘은 대단하다. 밖으로 나갔던 식구들을 저녁이면 어김없이 제 안으로 끌어들인다. 한때 바람이 불어 바깥을 떠돌던 탕자들이 집의 어마어마한 구심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돌아와 약간의 회한과 고즈넉한 평화 속에 놓이는 장면은 꽤나 진부하면서도 여전히 사랑받는 스토리다.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자유라고 하는 사람도, 집으로부터의 자유는 다소 주저하는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는데 가족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과 책임 등의 문제가 얽혀 있어서 스스로 결박당하는 사정이 있을 줄 짐작한다. 그래서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간에 집으로부터 얼마간의 거리를 갖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도 여겨진다.
위 시의 화자는 집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오래 집을 비워"서 가족 간의 유대도 불안하게 느껴지는데 그만 집을 잃어버렸단다. 물론, 술 취한 화자의 순간적인 착각으로 웃고 넘어가면 그뿐이지만 제목을 ‘이사’로 뽑은 게 눈에 남는다. 자신만 남겨 두고 어디론가 가버린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과 그것보다 더 큰 미안함이 행간 어디엔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집으로부터 결코 떠나지 못할 것이면서 문득, 집을 잃어버리고 싶기도 한 유혹이 무의식에 있다가 낮술 몇 잔에 현실이 되었다면 반길 일은 아니지만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여러 번 되풀이된다면 글쎄, 이 사회더러 술 좀 그만 먹이라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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