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그리는 시간 / 이동훈
세한도*를 따라 그릴까요.
빈집을 먼저 그리는 게 좋겠어요.
이쪽저쪽 가르는 칸은 얼씬없이 지나치세요.
길쭉이 지붕 선을 빼면 처마가 되고
기둥 자리에 세로로 줄을 내리면 담장이 서지요.
박공이 / \ 모이듯 언덕 위
소나무와 잣나무가 꼭 그렇게 서 있도록 그리세요.
혼자 서 있는 건 힘든 일이니까요.
내 편이 없다는 것은 사무치도록 쓸쓸한 일이니까요.
중동이 꺾인 늙은 소나무라지만
땅위를 빨판으로 기어가는 뿌리의 안간힘을
놓치지 않도록 하세요.
바닥이 밑천이고
여하한 경우라도 땅심으로 산다는 것이죠.
집 뒤가 허전하지 않도록 잣나무를
나란히 두고 서로를 슬쩍슬쩍 보는 것처럼 하세요.
그대와 나 사이도 그러하면 될까요.
곁을 주고 속을 트는 사이,
말없이 썽그레 웃는 사이 말이죠.
끝으로 막힌 곳을 뚫는 마음으로 문을 내세요.
솔바람 드는 길이고
그대를 내다보는 창이고
마침내 그대가 오시는 대문이기도 해요.
이제 붓을 놓고
빈집에 늘어지게 자도 괜찮아요.
어쩌면 꿈인 듯 생시인 듯 듣겠지요.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를.
* 김정희, <세한도>, 18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