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칸트를 읽을 때의 습관 / 김윤하

톰소여와허크 2014. 6. 22. 11:54

칸트를 읽을 때의 습관 / 김윤하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읽고 있는데 글자 위에 파리가 앉는다

지문이 닳도록 앞발을 문지르고

경기 일으킨 듯 뒷다리를 떨다가 날개를 턴다

 

나는 안다,

칸트를 읽으려면 파리도 한 박자 늦은 호흡이 필요하다

 

칸트를 읽을 때마다 나는 길을 잃고 다른 곳을 헤매고 있거나 우왕좌왕하거나 무기력해진다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파리에게도 인내가 필요한 것일까 천천히 글자 위를 기어가다 잠시 멈춰서고 또 기어가다가 멈춰서곤 한다 무채색 글자를 저렇게 오체투지로 읽으니 쫓아버릴 수가 없다 도리어 도망갈까 봐 내가 숨을 죽인다

 

이런 내용은 정말 오랜만이야,

변비 걸린 듯 끙끙대며 읽던 나는, 어느새 파리를 읽고 있다

 

- 『북두칠성 플래시몹』, 문학아카데미, 2014.

 

  * 칸트라는 술집 이름이 있었다. 주인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겠으나(칸트 읽은 것을 자랑하려는 속내도 있었을지 모른다), 칸트는 내게 절망을 강요했던 벽이었다. 시인은 판단력비판을 어렵게 어렵게 나아가고 있는 듯한데, 나는 순수이성 비판 그 앞머리부터 골머리 앓다가 두 손 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때는 고전이니 교양서니 해서 제 분수에 어려운 책을 의무감을 갖고 읽으려고 했던 것 같다. 재미나고 유익한 책도 많고, 그런 책을 읽기에도 시간이 너무 부족한데 자신을 괴롭혀 가면서 책 읽기를 할 필요가 뭐냐는 말을 고이 듣고 지금은 잘 안 읽히는 책은 피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칸트를 읽은 사람을, 읽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파리를 쫓아가며 칸트를 끝내 읽어내는 사람은 그 성실성을 따르고 싶고, 파리를 핑계로 잠시(어쩌면 푹) 쉬어가는 사람은 그 모질지 못한 인간성을 사고 싶다. 아예 옆길로 빠져 파리를 연구하거나, 파리를 사색하면서 칸트를 끼워 시 한 편 건지는 사람의 감각은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

  인생은 세상을 읽고 사람을 읽고, 읽은 것을 자기식으로 말하는 과정이기도 할 텐데, 제대로 읽고 말하기 위해서 “한 박자 늦은 호흡” 이 요긴함을 배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보았던 프로야구 심판도 스트라이크와 볼 신호를 한 박자 늦게 하지 않던가. 그렇게까지 해도 실수하는 게 인생이긴 하지만.(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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