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철물점 여자 / 홍정순

톰소여와허크 2014. 7. 1. 10:21

철물점 여자 / 홍정순

 

 

예외 없다 사람 손 가야 비로소 제값 하는

무수한 연장들 틈새에서

시 쓰는 여자가 있다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여덟 시까지

못 팔아야 살지만 못 팔아도 사는 여자

십 년 전 마음에 심은 작심作心이라는 볼트 하나

한 바퀴 더 조여야 하는

사월은 성수기

작업 현장에 연장이 필요하듯

여자에겐 시간이 절실하다

시를 쓰겠다고 한 시간 일찍 나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를

고요 속 새벽이 받아들인다

뒤란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

흙집을 개조한 철물점 기와지붕엔

아직도 이끼가 끼어 있어

늘 기역자로 만나야 하는 새 소리는

어긋나 포개진 기왓장 틈새에

알 낳고 품었을 시간들

지난 십 년을 생각나게 하는데

용마루 위 일가一家 이룬 새들의 울음소리에

자꾸만 착해지는 여자

지명 따라 지은 이름 ‘대강철물점’

간판 너머엔

적당히 보리밭 흔드는 바람이 불고

멋대로 떨어지는 감꽃도 싱싱하지만

개줄 하나 팔고 앉으면 받침 하나 빠지고

물통 하나 팔고 앉으면 단어 하나 달아난다

오늘도

철물처럼 무거운 시

플라스틱 약수통처럼 가볍고 싶은 시

 

- 『단단한 말』, 북인, 2013.

 

 

   * ‘대강철물점’ 주인의 시다. “못 팔아야”산다면서 철저한 직업의식을 보이면서도 또한 “못 팔아도” 산다며 한발 물러서는 여유도 있다.

   “작심”이란 것은 대강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두는 말일 텐데, 철물점 주인으로서 생업은 물론이고 시 쓰는 일에서도 일가(一家)를 이루고 싶은 마음인가 보다. 시인은 자기가 가진 것에서 자신만의 필살기를 구사할 줄 안다. “개줄 하나 팔고 앉으면 받침 하나 빠지고/ 물통 하나 팔고 앉으면 단어 하나 달아난다”와 같은 표현이 그렇다. 철물로 인해 받침과 단어(詩)가 떠난 것은 표면적 진술일 뿐, 생업과 시에 대한 고민이 마침내 시로 수확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작심이 무겁기만 하다면 십 년 갈 동력이 있었을까? 철물처럼 무겁기도 하고 약수통처럼 가볍기도 한 삶을 닮아 ‘대강’ 철저해야 할 이유를 생각한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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