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에 대한 명상>수록작

눈 그늘

톰소여와허크 2014. 7. 19. 19:44

장욱진(1990), <닭과 아이>

 

 

눈 그늘 / 이동훈

 

 

베개만 한 녀석이

베개 위에 엎어져 잠이 들면

어떤 별세상으로 빠져드는지 눈 그늘이 깊다.

장난감 잡은 손을 풀지 않는 녀석처럼

내 유년의 고집도 그랬을까.

땅강아지를 손가락으로 누르거나 개미를 팔뚝으로 조이다가

된통 물려 따끔거리던 날이면

지하 세계로 끌려가는 꿈에 시달렸으니.

부족한 공기에 허덕이다가

나무뿌리를 잡고 고향집 마당으로 빠져나와서야

숨을 몰아쉬던 쓸쓸한 꿈이었다.

때때로 수탉을 타고 미루나무 꼭대기에 올라

고갯길 넘어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화를 꿈꾸었지만

동화는 한번도 현실이 되지 않았다.

대신 아이는 금세 자라 아버지가 되고

베개만 한 녀석도 베개 두 개 이은 것처럼 자랐다.

베개에 가랑이 걸치고 또 어디로 여행 중인지

녀석의 눈 그늘이 흔들린다.

잠자코 모로 누워 있자니

나의 그늘도 누가 읽고 있다는 생각이 언뜻 스친다.

가엽고 설운 그림자가

닿을 듯 사라지고, 닿을 듯 스러진다.

하, 어쩌면 생각나려는지

눈 그늘에 어둠이 고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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