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 김경호
오늘도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아라비아 숫자에 갇혀
자욱한 미결의 먼지들만
책상 위에 쌓이고
우리는 결리는 옆구리에
저마다 붉은 소거(消去)키를 꽂고
낯익은 골목길로 흩어지는데
몇 개의 캄캄한 계단을 지나
내 영토
기진한 하루의 철문을 열면
일주일에 한 번쯤은
하늘에 별을 보지 않고
들어와야 하지 않겠냐고
곱게 눈 흘기던
아내의 마중도
이내 잠이 들고
함부로 구겨진 바지 같은 하루
어두워진 몸을 눕히면
자정 가까운 생활의 태엽도
이제는 풀려나오고
아내여
너의 꿈속
하얀 파도의 등을 따라가면
마당 가득히 감꽃은 떨어져
밤에도 환한
고향집 너른 마당을
너는 지금 걷고 있는가
오늘도 여전히 잠 못 드는 창 밖엔
휘파람새 소리
바람에 묻혀오는데
- 『봄날』, 두엄, 2012.
* 일찍이 시인 이상(李箱)은 “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달렸다.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가정(家庭)」부분,《카톨릭청년》, 1936)라며 가장으로서 떠안아야 할 삶의 무게감을 토로한 적이 있다. 폐병을 핑계로 삶을 방기해 버린 듯한 그의 이력 이면에 이런 절절한 육성이 있다는 게 이상을 다시 보게 한다.
가정이든 사회 조직이든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다는 건 그만큼 부담스럽고 외로운 일이다. 가출해서 가족 간의 새로운 질서(?)를 시험해 보는 모험은 영영 졸업이다. 지겨운 일을 팽개치고 훌훌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어도 당장의 생계와 가족의 안녕을 저버릴 용기는 없다. 그러니 그냥 일하는 게 대수고 정수다. “기진한 하루”의 대가로 “아내의 마중”과 “잠”이 있고 아늑하게 젖어드는 꿈자리가 있다. 하지만, 깊이 잠들지 못한다. 어딘가 자꾸 걷는 기분을 내며 새로운 길이 이어질 것도 같고, 뭔가 다르게 살 궁리도 있을 것도 같은데……, 드륵드륵! “키”를 작동시켜 또 하루를 되풀이해야 한다. 그게 ‘생활’이다. 생활은 이상에게 그랬듯이 끝내, “안열리는문(門)”이기도 하겠다. 그럼, 매달릴 근력이라도 키워야 할까.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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