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슬픈 싼타 / 김태정

톰소여와허크 2016. 9. 8. 12:52

 

 

슬픈 싼타 / 김태정

 

 

바람 부는 성탄 전야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그림동화 원고를 메운다

삼십여년 전의 아비가 되어

 

옛날 옛적 갓날 갓적 호랑이 담배 먹고 여우가 시집가던 시절에 인당수보다 깊고 보릿고개보다 높고 배고픔보다 서러운 산골에 참배같이 늡늡하고 댕돌같이 단단하고 비단처럼 마음씨 고운 나무꾼이 살았더란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배고픈 호랑이가 산속에서 어슬렁어슬렁 내려와…… 어쩌면 외로워서 동무가 그리워서 혼자 겨울날 것을 생각하니 까마아득해져서 그래서 호랑이는 산골마을로 내려온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파랑 병을 던지니 물바다가 되고 빨강 병을 던지니 불바다가 되고…… 그래서 호랑이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가고 나무꾼은 참배 같은 댕돌같은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더란다.

 

최저 생계비도 되지 못하는 원고지만

그래도 이런 해피엔딩이 있어서 좋다

삼십여년 전 아비도 그랬을까

 

삼십여년 전 아비의 그림동화 속에서

심청이는 심봉사와 해후하고

홍길동은 혁명을 시도하고

춘향이는 사랑을 꽃피우고

아비는 원고지에 무엇을 완성했을까

호랑이처럼 입 벌리고 있는 가난에

희망의 파랑 병 빨강 병을 던져

아비는 무엇을 구했을까

 

시인도 되지 못하고 소설가도 되지 못한 아비

아침이면 식구들의 양식이 되고

아이들의 양말이며 운동화가 될 원고지에

아비는 좌절된 해피엔딩을 꿈꾸었을까

 

어린 남매와 만삭의 아내

그리고 눈 내리는 성탄 전야

사랑도 혁명도 희망도

아비에게는 한끼의 봉지쌀도 되어주지 못하던

1960년대 그 미완의 성탄 전야

 

-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 성탄제 하면 ‘붉은 산수유 열매’(김종길, ‘성탄제’)와 ‘내용 없는 아름다움’(김종삼, ‘북치는 소년’)이 우선 생각난다. ‘슬픈 싼타’는 두 시의 이미지를 두루 맛보게 한다.

  가난한 아이는 성장해서 가난한 아비를 생각한다. 해피엔드로 끝나는 그림동화 속 장면과 다르게 현실은 가난하기만 하고 그 가난은 아비로부터 유전된 것이다. 아비가 암만 열심이어도 “입 벌리고 있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시인이 힘껏 원고지를 해치워 나가더라도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한다.

  어릴 적 화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싼타는 비싸지 못하고 싼, 그래서 가엽고도 슬픈 아비의 이름이다.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댕돌같이” 단단하지 않으면 안 될 노동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기껏 “파랑 병” 하나 던져도 불발탄이기 쉬운 현실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결말은 그야말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위로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시인은 그만, 슬픈 싼타를 따라 하늘로 가고 말았지만 다시 쓰는 그림동화에선 크리스마스를 기다려 튀긴 봉지쌀처럼 환한 눈송이로 다녀가면 좋겠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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