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안동 숙맥 김만동 / 안상학

톰소여와허크 2016. 10. 5. 16:06


'가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중섭 은지화)


안동 숙맥 김만동 / 안상학

 

   모 고등학교 국어과 김 선생은 담뱃갑 은박지 만 장 모아서 KT&G 복지재단에 갖다 주면 장애인용 전동 휠체어 한 대 기증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수집에 들어갔는데 그 마음이 갸륵하여 주변 사람들도 적극 동조하여 십시일반 모은 게 팔천 장 정도에 이르렀을 때는 국산 외국산 구별하는 감식력도 일취월장하여 삽시간에 분류를 해내는데 모두 혀를 내둘렀으나 의심 많은 어느 측근이 이상하게 여겨 그 회사에 문의를 해본 결과 낭설이었다는 정보를 전해주자 크게 낙담하여 그동안 도와준 주변 사람들 생고생시킨 게 미안해서 말도 못하고 차곡차곡 셈을 해서 쟁여놓은 팔천 장 은박지를 무슨 가보처럼 갈무리해두고 행여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회사측에서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휠체어 아니라면 목발이라도 하나 보내주지 않을까 학수고대하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한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실천문학사, 2016.

 

     

bb* “제 아들이에요. 박사지만 아직 남을 돕지는 못하죠”.

bb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연 중에 이 구절이 유난히 기억에 남아 있다. 랜디 포시가 박사 학위를 받던 날,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남에게 소개한 대목이다. 어머니의 자랑, 어머니의 유머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지향이 숙맥의 둔한 머리에도 와 닿았나 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고, 성취해서 자기실현을 하는 게 귀한 일이긴 하지만 혼자 잘 살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거다.

bb국어과 김 선생도 숙맥이다. 은박지 만 장 모으면 휠체어 준다는, 상식적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임에도 단번에 믿어버리고 팔천 장까지 와 버렸다. 여기 적극 동조한 주변 사람들도 숙맥 계열에 넣어도 무방하겠지만 그러면 세상이 (정말 기쁘게도) 숙맥만 북적이는 건가 할 테니 잠시 보류해 둔다.

bb공부를 많이 해도 남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잇속만 챙기다가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세상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것은 대개 똑똑한 사람 탓이 크다. 이런 세상에 김 선생처럼 남을 도우려는 마음을 내고 실제 행동 크게 도움이 안 되는 어리숙한 행동이긴 하지만으로 옮긴 것이야말로 잘난 사람도 해내지 못하는 퍽이나 아름다운 일이다. 어머니와의 일화를 소개한 랜디 포시 교수의 마음, 자신의 주변에 이런 숙맥들을 들춰내고 세상에 보내는 시인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bb그나저나 그 많은 은박지는 어찌하나. 이중섭이 있다면 소든 게든 뭐든 실컷 그리라고 내주고, 그 중에 한 백 점만 돌려달라고 하면 좋을 텐데 중섭이는 전쟁 없는 세상으로 건너가 이리로 다시 올 것 같지 않다. 그러면, 은박지 팔천장의 운명은 아직 미정인 건가.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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