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꽃낙지 / 이진욱

톰소여와허크 2016. 10. 12. 14:05



꽃낙지* / 이진욱

 

 

삽자루를 움켜쥐고 부럿**을 파헤치면

몰락한 양반가 후손처럼 먹물 가득한 선비가

들어앉아 있다

     

속세를 버리고 폐허 속에 들어앉아

다시 촉을 펼칠 날만 기다리던 선비

꽃을 피우고 싶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날에는 밤새 먹을 갈며

깊이 침잠하고 있다

     

이것은 차라리 아름다운 침묵

가끔 어둠 속에 혼자 사는 맛이 이런 것인가 보다

     

끌고 가는 것보다 가슴에 진 무게가 더 무거울 때,

사는 것보다 견디고 싶은 마음이 클 때,

나를 비웃듯 아침부터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

더 깊이 아래로 침잠하는 것이 때론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둠조차 들지 않는 구멍 속에서 눈물이 되어버린

몰락해도

몰락하지 않는 질긴 꽃

    

 

* 꽃낙지 : 가을 낙지를 나타내는 말.

** 부럿 : 낙지 구멍

 

- 『눈물을 두고 왔다, 문학의전당, 2016.

    

 

   * 낙지, 문어, 오징어류는 몸에 간직한 먹물로 인해 양반 행세하는 걸로 대우받는다. 시에 언급된 꽃낙지는 가을 낙지를 따로 부르는 말이다. 겨울잠을 자고 난 묵은 낙지에 비해 활동성이 좋은 데다 어민들의 호구책으로 사랑받았을 가을 낙지인 만큼 꽃처럼 예쁘긴 했을 것이다. 먹물을 기본으로 갖춘 데다 꽃이란 별호까지 달고 가을 낙지에서 꽃낙지로 호감도가 상승했으니 사람으로 치면 양반 중에서도 참한 양반인 셈이다.

   하지만 시인이 보는 꽃낙지는 먹물을 쓸 생각이 전혀 없다. 일필휘지로 문장을 자랑할 생각이 없고, 시국관이나 출사표를 내어 세상에 나갈 생각도 없어 보인다. 견디는 일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깊이 침잠하고 또 더 깊이 아래로 침잠하면서 자신을 갈무리할 뿐이다. 꽃 피울 생각 자체를 단념한 것은 아니니 부지런히 먹을 가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공부와 세상공부를 대신하는 중일 테다.

   “질긴 꽃은 당장 꽃을 피우지 않아도 언제든 꽃을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지지 않는 시심(詩心)이기도 한 시인의 자화상이라 말해도 좋겠다. 꽃낙지 안주 앞에서 질긴 다리는 곤란하겠지만 질긴 삶, 질긴 꽃을 한번쯤 생각하고 먹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참한 시인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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