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명태 / 김주대

톰소여와허크 2017. 3. 26. 20:41





명태 / 김주대



살아 있을 동안 너는 어떤 이름으로도 살지 않았다

물결의 부드러운 허리를 물고 힘차게 지느러미를 흔들던

너는 푸른 파도였고 끝없는 바다였다

수평선 위로 튀어오르는 무명의 황홀한 빛이기도 하였고


어느 날 명태,라는 이름의 언어가

너의 깊은 눈에서 바다를 몰아내고 파도인 너를 음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후로 너의 입과 눈에서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였다

명태라는 이름은 너의 주검을 요리하고 싶은 욕망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호명에는 음흉한 욕심이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누가 벗이여,라거나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

그 죽음을 제 입맛에 맞게 요리하고 싶다는 얘기는 아닐는지


- 『그리움의 넓이』,창비,2016.

 


  * 명태(明太)의 어원을 두고, 함경도 명천에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잡아왔다는 설이 소개되어 있는 걸 봤다. 밝고 크다는 한자어 의미를 생각해 보면, 떼로 몰려다니면서 그물에 포획되고 민가의 주요 요리로 사랑받으면서 자연스레 반기는 어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근심을 덜어 어민의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어류니 실제보다 더 크다고 말한들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생각도 정작, 명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긴 하다. 명태는 “어떤 이름으로도” 갇히고 싶지 않다는 게 시인의 생각이다. 생으로 먹고, 말려서 먹고, 찢어서 먹고, 버릴 게 없다며 창자와 알까지 버젓이 담그고 삶아서 식탁에 올라온다. 또, 여자와 명태는 때려야 한다는 억지 논리에 가만있는 명태를 동원한다든지, 조기 명퇴와 연관 지어 명태를 다시 등장시키며 당찮은 것을 명태에 덮어씌우는 인심까지 생각하면, 시인이 간파한 대로, “명태라는 이름은 너의 주검을 요리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해도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다.

   명태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시인의 고민은 모든 이름과 호명을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일찍이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꽃’에서)며 이름 불러주는 것의 소중함을 말했다면, 시인은 반대로 이름 불러주는 것을 경계한다. 심지어, “벗이여”, “사랑해”라는 말조차 그 무의식에 “음흉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거나 “제 입맛에 맞게 요리하고 싶다는”바람이 깔려 있기도 함을 떠올린다. 가족이라는 말, 사랑이라는 말이 더없이 좋으면서도 그 무게에 눌려 자기를 실현하지 못한 채 스스로 구속되는 경우가 없지 않고, 우정과 사랑을 내세워 자신에 맞게 상대를 길들이는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시인이 사랑 자체를, 남을 위한 헌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이면에 상대의 자유를 앗으면서 자기 실속을 챙기는 무의식적 욕망을 경계하는 것일 테다. 김춘수 시인도 이름을 불러주되, 마구 부르는 게 아니라,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다. 시인은 명태를 위하여 또, 명태와 다르지 않은 너와 나를 위하여 “너는 어떤 이름으로도 살지 않았다”라고 했다. 적이 공감하면서도 어떻게든 이름 부르는 자유는 또한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과정에 상대의 빛깔과 향기를 읽는 데 좀 더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내 빛깔과 향기를 만들어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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