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왕버들이 빨아들이는 나 / 손남숙

톰소여와허크 2017. 4. 15. 00:07



왕버들이 빨아들이는 나 / 손남숙


왕버들 안은 커다란 눈동자를 거느리고 숨은 거인의 얼굴
동굴과도 같은 그 눈길에 선뜻 다가갈 수 없지만
용기를 내어 내 걸음을 허락받는다
나는 휘어진 왕버들 아래 굽이치는 물빛에 매료당했다
검은 눈동자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 손을 뿌리치지 않으리라
나무는 눈알을 굴리며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간밤의 줄거리가 고요하다
내 어깨를 짚은 무엇인가를 느끼지만
그게 나무의 손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나는 돌아보지 않으려고 발에 지그시 힘을 준다
어서 저 나무의 눈알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과연 저 검은 눈이 내 눈을 마주할 것인지
아니면 흔적도 없이 빨아들여 이후로 다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인지
흰빛이 지나가는 건 백로의 날개이다
나뭇가지 아래로 조용히 지나가는 것은 흰뺨검둥오리들이다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왕버들 아래에서는 모두 입을 다문다
내 입술에 나무의 그늘이 들어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날이 온다

- 『우포늪, 푸른사상, 2015.

 

 

* 왕버들! 이름을 욀 것 같으면 청송 주산지, 밀양 위양지, 경산 반곡지, 창녕 우포늪, 성주 성밖숲 등의 왕버들 모습이 지나간다. 버들과 왕버들은 같은 버드나무과로 물가에 잘 자라는 특성이 있지만 느낌이 사뭇 다르다. 버들이 여리고 낭창한 느낌이라면 왕버들은 세월의 더께와 생의 간난신고를 수피에 간직하고 있다고나 할까.

왕버들이 고목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시인은 왕버들에서 검은 눈동자를 간직한 거인의 얼굴을 본다. 특히, “동굴과도 같은 그 눈길은 깊고 아득하여 스스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고목은 입으로 떠들지 않지만 제게 오는 손님을 겁박하기도 하고, 다독이기도 한다. 고목을 신령스럽게 여기고 어려워하는 시인에겐 후자 쪽이었을 것이다. 시인에게 그랬듯이 왕버들 고목은 백로에게 또 흰뺨검둥오리에게 그늘이나 마음자리를 내어줄 줄도 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풍경의 주인을 왕버들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왕버들이 이만큼 대우받는 것도 왕버들의 눈빛을 받으며 빨려 들거나 말거나 하는 인식의 주체로서 의 각성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백로, 흰뺨검둥오리, 물총새, 개구리, 미루나무, 버즘나무, 생이가래, 가시연꽃 저마다 한 사연 간직한 채 풍경은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자연스런 풍경에 말 많고 뜻 부리기 좋아하는 인간이 개입하여 어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종종 이야기한 바 있다. 부득이 어떤 결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으면 눈빛 그윽한 왕버들 어른의 이야기를 먼저 경청할 일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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