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우, 『시가 말을 걸었다』, 우리시진흥회&도서출판 움
임채우 시인의 산문집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시와 삶에 대해 풀어놓는 이야기가 흥미로운 데다 ‘우리시’에서 몇 번 뵌 인연으로 인해 글의 주변 정황이 더 잘 이해되는 면도 있었을 것이다.
월간 ‘우리시’ 교정보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여기에다 다 옮겨 적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막걸리 받아두고 임보, 홍해리 두 시인이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교정을 보는 데 그 경지가 예술적이라는 정도로만 요약해야겠다. 교정보다가 술에 취한 저자는 병원 신세까지 졌다는 말을 진담인 듯 농담인 듯 남겨 놓는다.
시인의 친구이기도 한 오명현 시인에 대한 평도 인상적이다. 시인의 공백기에 대해 아쉬워하면서도 제대로 맛을 내기 위해서 충분히 삭혀야 하는 홍어의 숙성기에 견준 만큼 “얼얼하고 시큼하면서 톡 쏘는 맛이 상상을 초월”하게 될 시를 오명현 시인은 분명,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박홍 시인은 임 시인이 동갑으로 알고 말을 놓았다가 나중에 띠 동갑인 것을 알고 실례를 사과했다는 분인데 인용한 시와 평이 또한 맛깔스럽다. “분홍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안간힘을 보셨는지요”(박홍, ‘분홍을 놓치다’중)라는 시를 읽으며 임 시인은 개망초에 분홍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에 접근하지만 실제 개망초는 분홍을 띠다가 분홍이 빠지는 것인 만큼 시인의 착오일 수도 있다. 하지만 “타자와 구별되는 자기만의 삶”을 분홍에서 읽어내는 시인의 안목에 박홍 시인도 미소를 지었을 성싶다.
시인이 자란 마을(구례 먹굴) 이야기인, ‘두 성씨 이야기’, ‘섬진강 이야기’도 퍽 재미난다. 은어 잡이에 나섰던 부자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포스터가 연상된다. 각종 개발로 섬진강 강모래를 다 쓸어가면서 “필터 기능을 하는 모래가 상실되자 그 많던 물고기들 역시 사라져버렸다. 더불어 유년의 추억마저 도둑맞고 말았다”는 시인의 비판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시인의 고향 이야기에 언젠가 읽었던 ‘꽃마중’이 생각나서 뒤에 붙인다.
꽃마중 / 임채우
바이칼호 대륙성 고기압이 위세를 부리던 설 연휴 지나자 햇살이 녹녹하고 푸짐한 게 봄도 머지않다. 허리병이 도져 설을 누워서 쇠었다는 지기의 내방이 하도 반갑다.
올해도 기어이 봄은 올 것이고 미리 예약을 해두세. 그러세, 올해도 꽃마중 가세. 아랫녘으로 내려가 내 살던 고향 들러 취운정에 올라 일배하고, 뒷길 관공도로 넘어 구례땅으로 산수유 구경가세. 온 세상이 노랗게 부황이 들어 산수유 하나하나 점고하려면 차라리 하늘의 은하수를 헤아리시지. 거기서 거년 여정대로 봄물 넘실대는 섬진강을 타고 올라 압록산장으로 가세. 참게탕에 은어 한 접시 튀겨 놓으면 봄맛이 입가에 자르르 세상천지 매화무덤에 앉아 소주잔 기울이는 이 흥취를 그 누가 알까. 이 산 저 산 매화 비치는 너울이 너무 좋아 흥에 겨워 가정역 앉은뱅이다리 난간 위에서 한 곡조 뽑아도 좋고, 낮게낮게 남실대는 강물에 썩은 마음을 씻어도 좋고, 이번에도 산빛 깨치는 색소폰 한 곡조 부탁함세. 사실 말이지 우리가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남철 같은 것이 끄집어 당기지 않는가.
- 『오이도』, 도서출판 움, 2013.
* 병을 앓던 “지기의 내방이 하도 반갑다”는 말부터 시인은 이미 그네를 탄다. 마음은 계절을 당겨 봄에 가 있는 것이다. 오랜 지기의 쾌차가 바로 꽃 소식인 게다.
시인의 고향 스케치가 하도 그림 같아서 일까, 머릿속에 그림 두어 점이 연상된다.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그 하나다. 병으로 누운 평생지기를 방문한 뒤 비가 그친 산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는데 안개가 쏠려가는 가운데 외딴집에 기를 불어넣듯 소나무와 봉우리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또 하나의 그림은 전기의 ‘매화초옥도’이다. 사방이 눈인데 혼자 있는 친구를 위해 누군가 거문고를 들고 산속의 집을 찾아가는 그림이다. 때마침 눈송이처럼, 폭죽처럼 매화가 피어 있어 오감이 즐겁다.
시인이 그린 그림은 몸이 아팠던 친구 걱정을 덜면서 ‘매화초옥도’그 이후의 풍경에 가까워 보인다. 문득, 도시에 살면서 마음이 다친 사람을 이 풍경 속으로 초대하면 어떨까 싶다. “이 산 저 산 매화 비치는 너울이 너무 좋아” 잠깐이나마 시름을 놓을 것이고, “참게탕에 은어 한 접시”에 원기를 회복하게 되지 않을까.(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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