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門은 어디로 갔을까요 / 허수경
저 門 아래에서 그대와 꿈을 꾸었네 헤어지지 말기를
이제 나 혼자 와서 본다네 저 문은 어디로 갔을까
저 문은 우주의 門? 그래서 이런 묘비명
여기는 옛 慶熙宮의 정문인 興化門 터입니다
저 門은 인적의 門? 어제 개업한 봉쥴다방 주크박스에서 들려오는 돈 워리 비 해피
바퀴가 지나가다 뭉개버렸나, 누군가 물을 주는 걸 잊어버렸을까
저 門은 동물성인가 식물성인가
저 門은 한 인간의 아가리였거나 근데 천천히 지나가는 생식도 수유도 끊어진 할머니
할머니, 어디 편찮으셔요?
이제 혼자 와서 보는 나는 무엇인가
무너져내린 곳에 서 있는 얼굴은 심술궂어라 무심의 심술이 날 울려요
그게 사랑인가 그게 없어져버림인가
그것이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 흥화문의 운명은 얄궂다. 일제 강점기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박문사의 정문으로 옮겨갔다가, 신라호텔 영빈관의 출입문으로 쓰였다가 다시 경희궁 정문으로 돌아왔지만 원래 자리인 동향이 아니라 남향이 되었다. 원래 자리에 구세군 빌딩이 들어서고, 그 어디쯤에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었을 텐데 시인은 이를 묘비명으로 읽는다.
이 흥화문 터는 시인이 “그대”와 함께 거닐며 그대와 끝까지 동행하기를 바랐던 꿈이 자라던 공간이지만, 그대는 다른 꿈을 갖고 떠났을 거다. 그 빈자리와 한때 문이었던 빈자리가 겹치면서 시인은 회한을 토로하는데 우린 그걸 시로 읽는다.
문은 열고 닫을 때 의미를 갖는다. 한자어 개(開)와 폐(閉)도 문의 빗장을 두 손으로 열거나, 빗장을 지르는 모습이다. 시인은 문이란 게 우주 어디로든 열린 것인 줄 알지만, 이제 혼자 남아서 빗장을 만지작거리는 모습니다. 사랑하는 동안에는 열고 닫는 일이 일상이기도 하지만, 사랑이 떠난 후에야 여는 일도 닫는 일도 생경하다.
“그게 사랑인가 그게 없어져버림인가”
보이지 않는 문의 입구에서 시인은 아직 원망을 버리지 못했지만 결국, 문이란 혼자 지나게 되고, 빗장을 열고 닫는 일도 자기 몫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후 시인이 열고 간 문은 그녀의 또 다른 책으로 짐작해볼 수 있겠으나 이날의 쓸쓸한 자취는 이렇게 묘비명처럼 남아있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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