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은행잎 감상(感傷) / 박재삼

톰소여와허크 2019. 8. 27. 23:13

은행잎 감상(感傷) / 박재삼

 

 

내 열병(熱病)도 가실 겸

지난번 고향길에는

금융조합(金融組合) 뒤뜰에 가

은행잎을 보면서 새 눈물을 배웠네.

 

은행잎을 줍던 날 밤은

돈을 줍던 꿈으로

홀로 쓸쓸한 소학생(小學生)이었던가.

 

은행 한잎을

수신(修身)책에 꽂고서

돈생각이 나을까

공부생각이 나을까.

 

나는 선생님 앞에

많은 아이와 함께 은행잎 되어

자꾸자꾸 손을 흔드는 것이다.

, , , , ……

 

황금의 눈물을

가을 땅바닥에 지우며 나는 섰어라.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시선집 천년의 바람, 1975)

 

 

감상 : 시인의 어머니는 진주장터 생어물전”(추억에서)에서 장사를 하셨다.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만큼 손 안 닿는 한이던가라는 구절에서 어머니의 한스러운 삶과 가난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일찍 철이 들었을 것이다.

중학생으로 입학하는 대신 중학교에 사환으로 취직해야 했던 시인은 학교 종을 울리면서 막연하게나마 삶의 서러움을 떠올렸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시에 인용된 금융조합은 돈이 쌓인 곳이지만 시인 가족이 쌓아두거나 당겨쓸 돈은 없었나 보다. 때마침 금융조합 뒤뜰은 은행잎이 어지럽다. 돈은 은행과 은행잎의 이미지로 투사되지만 은행잎은 흔하고 돈은 아쉬울 따름이다. “은행잎을 줍던 날밤에 돈을 줍던 꿈을 꾸는 마음이 오죽할까 싶다. 돈을 얻지 못하고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소학생(小學生)의 쓸쓸한 마음이 헤아려지는 대목이다.

그때의 소학생은 훗날 소월을 잇는 대표 서정 시인으로 자리매김하지만 생전의 삶은 시종 가난했다. 여기에 병고까지 더해 말년 또한 외롭고 쓸쓸했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시편들이 위로가 된다. 서러운 눈물을 황금의 눈물로 변주할 수 있었던 건 시인의 감성이다. 황금의 가치를 좇는 게 아니라 눈물에 값을 매기는 것이다. 속된 것과 순수한 것이 만나서 같이 정화되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남는 슬픔은 어쩔 도리 없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시포스 / 오명현  (0) 2019.09.15
비산동 / 이철산  (0) 2019.09.07
나날 / 최승자  (0) 2019.08.11
포옹 / 배한봉  (0) 2019.08.05
순례자의 양말 / 이원규  (0) 2019.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