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시시포스 / 오명현

톰소여와허크 2019. 9. 15. 00:34




시시포스 / 오명현

 

 

시시포스는 하데스에

어머니는 사각 쟁반에 유폐되었다

시시포스는 죽으나 사나

바위를 밀어 올리고

어머니는 쟁반에서 콩을 굴린다

플라스틱 함지박에 뒤섞인 흰콩 검은콩을

색깔대로 나누어 담는 것

 

몫일을 끝내고 금세 무료해진 어머니에게

헤살꾼도 아닌 어미의 딸내미는

악덕 십장이 노역을 부과하듯

다시 콩을 뒤섞는다

 

딸네 집에 얹혀사시면서

콩을 굴리는 것은 밥값을 하는 일

 

까짓것 치매라는 병 하나로

어머니의 몸에 밴 노동의 방식이

쉽사리 바뀔 리 없다

 

- 알몸으로 내리는 비, 도서출판 움, 2019.

 

 

감상- 부조리란 말을 적잖게 쓰고 또 듣게 된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지만 철학에선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나온 용어이고,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그 의미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비행을 고하고 하데스의 명을 기만한 죄로,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고 올라가는 벌을 받는다. 정상에 올라선 순간, 바위는 다시 굴러 내려가고 시시포스는 새로 바위를 밀어야한다. 시시포스는 이 일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할 운명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인생에서 어떤 의의도 발견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부조리란 말을 준 것이다.

부조리란 말 속엔, 그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바위를 밀고 올라가는 일, 잠시나마 빈손으로 내려서면서 생을 복기하는 일 그리고 어떤 경우든 주체적 삶의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걸로 이해하고 있다. 막연한 느낌이 없지 않으니 시시포스의 신화를 새로 읽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적어두고 시인의 시시포스를 본다.

시시포스 역은 어머니다. 친어머니일 경우 악덕 십장은 누이가 될 것이고, 장모일 경우 아내가 되겠지만 100세 인생을 사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와 딸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들 집이든 딸네 집이든 의지하지 않고 살겠다는 부모가 대부분이지만 슬프게도, 병이나 치매기로 인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해진다. 가정에서 모시느냐, 요양원에 보내느냐, 누가 챙기느냐 등의 어쩔 수 없는 갈등이 있지만 각자의 양식대로 또 형편 닿는 대로 할 뿐이다.

가정에서 도리를 다하려는 시인의 식구는 어머니에게 콩 고르기를 반복시킨다. 콩 심고 거두고 나누는 것은 평소 어머니에게 익숙한 것일 테고, 그런 것을 찾아서 옆에서 잔소리하며 일을 계속 시키는 건 어머니가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근심하고 배려하며 함께 놀아주는 애정 어린 행위다. 모녀가 있는 방안에 콩밭 매는 아낙네로 시작되는 칠갑산한 자락 깔면 어머니의 노동은 더 가벼워질 거란 생각도 든다.

어찌되었든, 이 세상으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길에 치매가 있다고 생각하면 삶은 무거워질 게 분명하다. 홍해리 시인은 치매를 매화에 이르는 길이라며 애써 상황을 돌려서 보고 슬픔과 위로와 치유의 시편들을 남긴 바 있지만 오명현 시인은 어머니와 식구의 뒤편에 서서 어머니의 무의미한 행동을 시시포스의 그것에 비유하며 인생의 부조리를 떠올리게 한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는 것도 부조리요, 제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도 부조리다. 부조리의 연속인 삶, 그 가운데도 시시포스가 바위를 밀어올리듯, 한 알의 콩을 헤아리게 하고 또 헤아리는 이유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그 부질없음에 탄식도 하는 것은 존재의 의의를 밝히는 일이기도 하겠다. 하물며 그 일이 사랑으로 뜻하고 의리로 행하는 일이라면 두말할 이유가 없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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