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이승수 역),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마음산책, 2015
- 모국어 외에 하나의 언어를 유치원 학생 수준으로나마 갖추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와 나 주변 사람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차원이 다른 사람도 있다. 일찍이 시인 백석은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 천재였다. 근래에 여덟 살 난 유림 양이 티비에 나와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걸 보면 입이 벌어진다.
작가 줌파 라히리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2개 국어를 구사했다. 집안에선 부모의 언어인 인도 벵골어를, 미국 학교에선 영어를 배웠고, 영어로 소설을 써서 성공한 작가가 되었다. 스물다섯이 된 줌파 라히리는 문득, 이탈리어를 알고 싶다는 강한 유혹이 생겼고, 마침내 이탈리어로 산문을 쓰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 책이 그 내용이니 하나의 언어를 더 얻기까지의 이야기다.
줌파 라히리는 언어를 배우는 일을 호수를 건너는 일에 비유한다. 기슭만, 호숫가만 맴도는 것은 연습은 되겠지만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삶은 호수 한 중간을 건너는 시도로 얻어진다는 것이다. 호수를 한 번 건너면 두 번 세 번 건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그렇다고 언어의 중심으로 갈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줌파 라히리는 뒷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조정한다. 하나의 언어는 호수가 아니라 넓은 바다란 걸 깨쳐서다. 언어의 중심으로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인식 끝에 그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가 오히려 창조의 원동력이란 생각도 갖는다.
“불완전은 발명, 상상력, 창조성에 실마리를 준다. 자극한다. 내가 불완전한다고 느낄수록 난 더욱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자신의 글쓰기는 이러한 불완전에 바치는 경의라고 덧붙인다.
모국어로 된 책, 그 중에 재미난 책만 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에 또 하나의 언어를 익히며 시간을 낭비하는 게 맞을까 고민되는 사람이라면 저자 자신이 고마워했던 문장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인생이다”를 듣게 될 것이다. 불완전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일랑 외국어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언제든 부딪치는 일이긴 하다. (이동훈)
* 그림은 책 표지화로 사용된, 에이미 베넷, <Out to Dr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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