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하, 『길을 잃는 것이 길을 찾는 길이다』, 행복한책읽기, 2020.
- 중고등학교 시절, 등·하교용이나 신문 배달용으로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를 타고 멀리 나갈 일은 드물었다. 기껏해야 동네나 시장, 도서관 다닐 때 이용했을 것이지만 자전거는 퍽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양손을 놓고도 몸을 부리면서 방향을 바꾸는 재주라든지 앞바퀴를 들고 낮은 턱을 넘는 기술에도 재미를 내곤 했다.
그러다가 김훈의 『자전거 여행』(2000)을 읽고, 자전거가 낯선 지방 먼 거리를 여행하는 데도 쓸모가 있음을 알았다. 김훈은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했다. 자전거 여행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가슴에 품고 몸을 써서 바퀴를 굴려 그 길을 느끼는 일이다.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숨은 역사 문화를 알고, 사람의 체취를 받아들이는 일은 분명 설레는 일이다.
김훈의 자전거는 국내를 달렸지만, 저자 박주하의 자전거는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 해외 오지를 주로 다녔다. 저자는 20대 초반에 서울과 부산까지 자전거로 3박 4일 종주한 적이 있다고 하니 이미 그때부터 자전거와 함께 모험을 살 마음의 씨를 심었을 걸로 보인다. 그 마음의 씨는 직장생활을 그만둔 인생 중후반에 발아해서 지구 이편저편을 자전거로 누비게 되었을 것이다. 코로나로 해외의 길을 나서지 못하는 지금엔 고양시 교외를 오가며 저자의 자전거는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자전거 여행의 가이드북이라 할 만한 『자전거를 타고 세상을 만나다』(2019)를 출간한 바 있다. 이번에 출간한 『길을 잃는 것이 길을 찾는 길이다』는 사진을 곁들인 에세이로 언어를 매만지고 문장을 단련한 흔적이 뚜렷하다. 불필요한 말을 아끼고 한 말도 줄이면서 일면 디카시에 가까운 에세이가 되었다.
몬테네그로 古都 코토르에서 찍은 사진을 배경으로, 이렇게 적는다.
“잘 짜여진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방황 없는, 방랑 없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어디서 멈춰야 할지 주저할 때
비로소 여행은 시작된다”
세상을 모르고, 내일을 모르고, 정답을 모르는데 지금 해야 할 당위나 철칙을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다. 오히려 고민하고 주저하는 게 인간적이란 생각도 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괴테의 말처럼 방황과 방랑은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진지한 애씀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 같은 지역의 사진 한 장 아래엔 이렇게도 적는다.
“시간에 쫓기지 아니하고
여유롭게 천천히 달리다 보니
비로소 하늘의 구름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고
비로소 땅 위의 풀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더라.
이제는 한 템포 늦춰가면서
쌓아가기로 작정했다”
요즘 따라 구름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지켜보는 게 좋으니 저자의 생각에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세상 궁금한 병아리가 땅 한번 쪼고 하늘 한번 쳐다보듯이 풀을 한참 보고, 구름을 내내 보는 일은 너무 화평해서 방랑도 아니고 모험도 아닌 듯하다. 하지만 바쁨과 속도에 매몰되어 여유와 모험을 잃고 사는 주변을 돌아볼 것 같으면 결국 작정하고 여유를 내야 할 이유가 있다.
내 자전거는 해외에서 달릴 일은 없겠지만 오일장을 오가는 수단이 되고 가끔씩 시장 삼거리 주막 앞에 세워져서 주인 대신 구름 구경하고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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