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하, 『장난감 도시』, 문학과지성사, 2009(초판본, 1982)
- 『장난감 도시』, 2009년 3판본과 1982년 초판본 사이에 문장을 일부 다듬고, 민감한 내용을 살짝 들어낸 것이 보인다.
시작 페이지를 보니, “내가 이 무렵의 일을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오로지 학예회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매년 한 번씩 갖기로 되어 있는 학예회를 전쟁 통에 여러 해나 걸러 오다가 그해에야 우리는 비로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에서 “학예회 덕분이라고 생각된다”를 “학예회 덕분이다”로, “여러 해나”를 “여러 해”로 수정한 것에서 말을 아끼는 퇴고의 묘를 맛볼 수 있다.
내용에선, 소설 말미의 ‘누나’와 관련된 이야기 열다섯 줄이 통째로 빠졌다. 독자에 따라선 납득하기 어려운 불편함과 찜찜함을 던지면서 충격을 준 장면이고 다른 시각으로 보면. 그런 불편함과 무거움이 오히려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어 좀처럼 책으로부터 분리되기 어려운 경험을 선사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 논란의 장면을 작가가 오랜 고민 끝에 뺀 것으로 보이는데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작가의 최종 선택을 존중하는 쪽으로 가겠지만 표지는 샤갈의 그림, ‘샹봉 쉬르 락 (Chambon-Sur-Lac)’을 택하겠다. ,
『장난감 도시』 는 자전적 요소가 상당 부분 반영되었기에 작가로선 문학적 수사를 떠나서 오해의 여지를 줄이고 싶었는지 모른다. 동시대, 바로 옆 동네를 배경으로 한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도 자전적 요소가 많아서 두 작품을 상호 비교해서 읽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이동하, 김원일 작가는 둘 다 1942년생으로 1954년 대구로 이사 온다. 김원일은 고향 김해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구로 왔고, 이동하는 경산 남천초등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 대구로 왔다.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은 성내동 약전골목 인근을 중심으로 주로 서문시장과 칠성시장 사이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이동하의 『장난감 도시』는 대구역과 경부선 위쪽인 고성동을 중심으로 달성공원 주변까지 소설 무대가 펼쳐진다.
고성동 판자촌에 대한 이동하의 묘사는 이렇다.
“조그만 방 하나가 우리 가족이 차지한 공간의 전부였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죄다 판자 쪽으로 둘러친 그것은 방이라기보다 흡사 커다란 나무 궤짝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나마 세간들이 차지하고 남은 공간엔 네 식구가 발을 뻗고 누울 재간이 없었다. 나는 결국 윗목에 놓인 장롱 위에다 따로 요때기를 깔고 이층잠을 자기로 했다.
피곤한 탓이리라. 다들 금세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잠자리가 너무나 불안할뿐더러 속도 계속 편칠 못했다. 게다가 판자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 방에서부터 밤늦도록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나는 자꾸만 몸을 뒤척였고, 그럴 때마다 낡은 장롱이 삐걱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가 깜박 무겁고 아득한 잠의 벼랑 밑으로 굴러떨어졌는데 기이하게도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웃음을 지었다. 우린 어쩌면 장난감 도시로 잘못 이사를 온 건지도 몰라……"
김원일 가족의 대구 행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월북한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 이동하 가족의 대구 행도 해방 공간에서 아버지나 삼촌이 가졌던 이념이나 행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나 소설에서 구체적 정황에 대한 얘기는 없다. 경산 지역의 삼성역과 남천초등학교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우울한 귀향’, ‘파편’ 등의 소설에서 그나마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에선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어렵게 생계를 잇고 ‘길남’이 신문배달을 한다. 이동하의 『장난감 도시』에선 아버지 주도로 풀빵과 냉차를 팔기도 하지만 굶는 때가 더 많다. 결국, 어머니는 병을 얻어 죽고, 누나는 민며느리로 상이군인 가족에게 팔려가고, ‘나’는 구두닦이에 나선다. 이들 가족들뿐만 아니라 당시를 살았던 민초의 모습이 대개 그랬을 듯도 하다. 어느 여인의 죽음을 묘사한 대목을 읽어본다.
“분지의 겨울 날씨는 변덕스럽고 혹독하다. 불행히도 그 속에 갇힌 우리 도시는 불과 하룻밤 사이에도 수명의 동사자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 주검들은 특히 공원 주변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공원으로 오르는 돌계단과 그 바깥쪽의 메마른 하수구. 그리고 두 개의 정자와 어느 시인의 시비(詩碑) 아래까지 주검은 뒹굴고 있었다. 돌보다 더 똑똑하게 얼어붙은 벌거숭이의 땅보다 더 황량하게.”
동사자 중의 한 명은 공원 들어가는 입구 계단에서 흠집투성이 사과 몇 알을 내다놓고 팔던 여인이다. 굶주린 여인은 사과의 썩은 부위에만 입을 대서 허기를 면한다. ‘나’는 그녀에게서 어머니를 연상한다. 둘 다 굶주림과 실의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배경이 된 공원은 현재의 달성공원이다. 소설 속 공원의 시비는 1948년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이자, 가장 아름다운 시비이기도 한 이상화 시비인데, 그간 상화 시비를 지나면서 이런 장면을 떠올린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동하 소설가가 대구를 왜, 장난감 도시로 여겼는지 의문은 아직 남아 있다. 판잣집이 즐비했던 도시는 아파트 일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니 이 또한 장난감 도시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동하는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글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부지게 맞서지 못하는 심약한 마음이 나를 책 속으로 숨게 했고, 망치 따위 일상적 도구조차 제대로 부리지 못하는 무력한 손이 원고지를 붙잡게 했다고도 생각된다. 어쨌거나 그것들 속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만은 저 도저한 허무의식으로부터도, 그리고 저 생존의 불안감으로부터도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림이 좋아 화가가 되고 싶었다는 김원일도, 문학 외에 다른 삶을 꿈꾸지 않았다는 이동하도 장난감 도시의 한때로부터 멀리 지나왔다. 작가가 지역을 훌륭한 문장으로 남겼다면, 지역이 작가를 챙기는 것도 당연하다. 김원일은 조그마한 집(문학관)을 얻었지만 이동하는 이층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는 그만한 크기의 집도 아직 얻지 못했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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