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산문> 나는 태양 때문에 그를 죽였다

톰소여와허크 2022. 11. 10. 08:00

 
채형복, 『나는 태양 때문에 그를 죽였다』, 학이사, 2022.
ㅡ법학자이면서 문학도이고 시인이기도 한 저자는 법과 문학을 넘나드는 글쓰기 끝에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법정에 선 문학』을 통해 필화 사건을 겪은 한국 문학을 다루었고, 이번 『법으로 읽는 고전문학 : 나는 태양 때문에 그를 죽였다』에선 유럽의 고전 작품을 법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기를 꾀하고 있다.
여덟 편의 고전 중에 존 밀턴의 『실낙원』을 보자면, 법의 적용을 고민하기보다는 풍성한 문학 이야기의 꽃을 피워 놓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과의 관계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이 『실낙원』을 읽고 아담과 사탄의 감정에 이입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했다. 궁금증이 생겨 『프랑켄슈타인』에서 관련 부분을 찾아보게 된다.
소설 속 빅터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 남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자신의 외모를 알아차리고 절망하는 대목이다. 『실낙원』을 읽은 괴물은 이렇게 말한다, “그 책은 경이로우면서도 무섭기도 했어. 자신의 창조물과 싸우는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은 아주 놀랍더군. 나는 책에서 일어난 여러 상황이 내가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무척 충격을 받았어. 아담처럼 나도 다른 어떤 존재와 유대 관계가 없었어. 하지만 그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나와 많이 달랐어. 그는 신의 손에서 완벽하게 생명체로 세상에 나왔고, 자신이 창조자의 특별한 관심을 받으면서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았지. 그는 더욱 뛰어난 존재와 대화도 나누고 지식도 얻을 수 있었어. 하지만 나는 비참하고 무기력하고 고독했어. 오랫동안 사탄이 나와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라며 자신의 처지를 아담보다 훨씬 더 비극적으로 인식한다.
『실낙원』은 존 밀턴이 시력을 잃고 65세에 쓴 것이고,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가 불과 19살의 나이로 쓴 것이다. 특히 아래의, 『실낙원』 문장은 『프랑켄슈타인』의 첫머리에 인용되어 있으며 두 책을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창조주여, 흙으로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내가 간청하더이까? 어둠에서 나를 일으켜 이 즐거운 낙원에 놓아달라고 내가 원하더이까?>
『프랑켄슈타인』에서, 친절과 동정을 기대했던 오두막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낀 괴물은 아담이 그의 창조주에게 간청하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담이나 괴물이나 창조주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은 동일하다. 다만 아담에겐 하와가 있었지만 괴물 자신은 혼자라서 훨씬 더 쓰라리다.
사실, 괴물에게 공감을 준 아담의 독백은 창조주에 대한 저항 의지만 떠올린다면 하와의 말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와는 원죄에 대한 두려움에 떨면서도 고통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파멸로써 파멸을 깨뜨릴 힘’을 선택해서 죽음까지 불사하는 면이 있다고 저자는 보았다. 하와보다 더 나간 것은 사탄이라고도 했다. 천사든 어떤 생명이든 창조주의 의지가 아니라 스스로 태어나 스스로 컸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은 창조주의 역할을 부정하거나 제한한다.
저자는 아담과 하와와 사탄의 행위를 통해서 이들이 인간을 속박하는 권위에 저항하는 면이 있음을 거듭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신의 명령에 따라 낙원에 계속 머물렀으면 어땠을까를 묻고 그 대답을 아나키스트 바쿠닌의 말로 대신한다. 바쿠닌은 복종을 굴욕적인 노예로 사는 길로 보았다. 따라서 불복종만이 인류를 해방하고 구제시킨다며 아담과 하와의 선택이 인간적 자유를 위한 최초의 행위임을 역설했다. 관련 이야기는 저자의 또 다른 책 『19세기 유럽의 아나키즘』에서도 부연 설명되어 있다.
저자는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이며 『실낙원』 삽화를 그리기도 했던 윌리엄 블레이크까지 소개하며 불복종과 반역의 의미를 파고든다. 블레이크는 사탄을 그리스도 예수 및 여호와와 동격으로 보았다. 시인 보들레르 역시 몇 편의 시에서 이전 같으면 절대자 신이 나왔어야 할 자리에 악마 사탄을 배치하고 기도와 바람을 듣게 한다.
창조주에 대해서 피조물의 관계에 있는 사탄은 “하느님의 주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위대한 배반자의 길을 선택”했지만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저자는 애초에 양자가 선 자리 즉 관계의 불평등을 문제 삼고 싶어한다. 내 뜻대로 따르라는 창조주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피조물의 대결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사탄의 불복종 원인은 관계의 불평등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로 인한 창조주에 대한 그의 모멸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린다.
창조주에 대한 아담과 하와의 저항 대가는 낙원에서 추방이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먼저 따 먹은 하와에 대해 아담은 탄식도 하지만 저자는 호불호를 분명히 한다. “만일 그녀가 절대 신의 금지명령을 어기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직도 하느님이 설정한 이성의 틀에 묶인 채 자유롭게 상상하고 공상하는 주체적 인간으로 서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한 저자의 소개 글도 잠깐 보자. 유토피아인은 도시와 농촌을 2년씩 번갈아 가며 생활하며 하루 6시간 일한다는 것이다. 특히, 빈곤이나 나태로 도둑이 되거나 될 것 같은 사람에게 법의 적용을 먼저 말하지 않고 유용한 일자리를 먼저 마련해 주라는 말이 상큼하게 들린다. 시대를 앞서간 이야기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있을 텐데 궁금증을 해결할 제일 좋은 방법은 『유토피아』를 사서 읽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의 요긴한 장점 중의 하나는 다음에 읽고 싶은 책을 안내 받는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저자는 유토피아를 통해 승자독식 구조의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안으로 언급되는 기본소득 문제를 다루고, 최소한의 법률로 유지되는 도덕사회의 일면도 언급한다.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인간적 사회를 응원하면서도 그 인간에 노예가 포함되지 않는 유토피아의 한계를 아프게 여긴다. “그들과 함께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매조지 말은 어떤 타협도 의심도 없이 명료하다. 이런 태도는 법학을 ‘약자의 편에 서서 싸우는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저자 생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고전과 법의 단순한 기계적 연결을 꾀하지 않는다. 법과 문학과 사람을 넘나들며 생각의 접점을 발견하는 재미를 누리면 좋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