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간드레, 2022.
- “내 조그만 공간 속에 추억만 쌓이고 / 까닭 모를 눈물만이 아른거리네./ 작은 가슴 모두 모두어 /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김광석의 노래로 알려진 <먼지가 되어>의 일부다. 얼핏 류근 시인의 시를 김광석이 노래로 불렀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처럼 <먼지가 되어>도 이윤학 시인의 시인가 싶었는데 아니다. 여러 가수에게 리메이크 된 <먼지가 되어>는 1976년 송문상이 작사해서 이미키 가수에게 준 노래다. 이후 이미키는 송문상의 아내가 된다. 송문상은 이 노래에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실려 있다고도 했다.
그럼, 이윤학 시인은 <먼지가 되어>의 가사를 자신의 산문 제목으로 왜 가져왔을까. 1993년 가을, 라디오 방송에서 김광석 가수가 이윤학의 첫 시집인 『먼지의 집』(1982) 표제작을 읽어 주고, 자신의 리메이크곡 <먼지가 되어>를 불러준 일이 있었다. 이 노래를 당시 카페에 감금되다시피 지낸 시인이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다는 것이다. 시인은 「솜공장에서 –먼지」란 시를 떠올리며 실제 솜공장에 일하던 지난날을 추억한다. “붉은 솜을 만드는 날이면 붉은 먼지가 자욱했다. 아침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곤 하였는데 라면 국물을 마실 때 목이 컬컬했다. 눈썹에도 콧구멍 털에도 머리털에도 그날 만드는 솜먼지가 쌓이고 붙고 앉았다”고도 하고, 솜먼지가 유릿가루로 변신해 피부를 긁는 것을 견디며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다고도 했다. <먼지가 되어>는 그때의 동료 아니면 이런 고생을 전혀 모를 그 반대편의 당신과 함께 듣고 싶은 노래이니 낭만적인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윤학 시인은 부지런히 시를 쓰는 현역 중에 술을 가까이하는 열손가락 안에 드는 시인이란 소문을 듣고 있다. 그런 그가 “41년간 빨대를 꽂고 마신 술을 딱 끊고 반년간 끙끙 앓았다”는 소식도 전해준다. 시인이 기억하는 조부는 바깥으로 떠돌던 인물이다. 어느 날 술을 잔뜩 먹고 귀가한 그길로 죽어서 부고장까지 냈는데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조부는 북해도 탄광일로 진폐증을 앓다가 끝내 돌아가신다. 조부에게 손목시계를 유산으로 받은 아버지는 열두살부터 금광에 다니면서 진폐증까지 물려받는다, 폐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농부 아버지는 일을 잠시도 쉬지 않는다. 시인에게 아버지는 자신과 싸워 간신히 이기는 사람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니체의 삶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분이다. 아버지가 갱에서 들고 다니던 간드레(candle)는 이제 시인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이 만든 출판사 이름도 간드레다. 시인은 꺼지지 않는 불빛을 이미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밖에서 들어와서 보던 아들의 눈이 아버지에겐 바로 금광이었다는 말씀도 불빛처럼 반짝인다.
어머니는 술로 쓰러진 아들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며 술병 대신 원고지를 내어준다. 시인에게 원고지는 “무의식의 세계로 통하는 창문 테두리”다. “여기서는 할 수 없는 거 되지 않는 거 거기서는 단정이나 규정 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었다”는 그런 시간을 살게 하고, 그런 공간을 갖게 한다. 어릴 적 지독한 말더듬이었다는 아이는 원고지를 만나면서 세상을 살아갈 무기를 얻었다. 술병을 오래 잡고 있을 때에도 시인이 원고지를 아주 떠난 일은 없어 보인다.
“텃밭으로 내려가 하루 동안 쑥 자란 오이 하나를 따 한 입 베어 문다. 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어떻게 이런 맛을 전할 수 있을까 고심하”는 것으로 시인의 근황을 짐작해 본다. 작가를 작가답게 만드는 방법이라면 이렇게 저렇게 고심에 고심을 더하는 길 말고는 없을 줄 안다. 시인의 집 마당에 사철나무가 심겨져 있을지 궁금하다. 예전처럼 사철나무 위에서 책을 보거나, 먼 데를 보는 것도 좋고, 듣기만 하고 부르지 못한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을 사철나무 들으라고 흥얼거리면 더 좋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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