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그 나라의 역사와 말』, 궁리, 2002
-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는 아주 특별한 학교다. 이승훈이 안창호의 영향 아래 1907년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래 김소월과 백석이란 천재 시인과 화가 이중섭, 사학자 함석헌 등을 배출한 학교다. 조만식과 유영모가 교장을 역임했고, 이광수, 김억, 염상섭, 임용련 백남순 화가 부부가 교사로 재직했던 곳이니 그야말로 문화예술의 산실이다.
백승종 저자는 김소월, 백석 등 문인 예술가 대신 오산학교 출신의 이찬갑(1904-1974)이란 인물에 주목하면서 관련 인물인 이승훈, 함석헌, 김교신 등의 활약을 조명한다. 이찬갑은 풀무학교(1958-) 건립자이지만 다소 잊힌 이름일 수도 있겠는데 우연히 그가 남긴 신문스크랩북과 기사 옆에 메모해둔 글을 보게 된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란다. 저자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이찬갑의 내면 인식을 통해 시대 조망과 함께 참된 지식인, 평민 예수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찬갑은 함석헌이 주도하는 오산의 성서 모임에도 적극 관여했다. 이찬갑은 기독교가 사원화(寺院化)되어 타락하는 것을 경계했다. 실제 1938년 결성된 조선기독교연합은 황국 신민의 서사를 제창하며 변절하고 만다. 이찬갑은 종교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성서조선》 간행에 참여했다. 《성서조선》은 1942년 일본 경찰의 눈 밖에 나 이찬갑도 함석헌, 김교신 등과 옥고를 치러야 했다.
오산학교와 지역에 대한 언급도 자연스레 나오는데 오산학교는 학교 병원, 목욕탕 등 학교 시설을 개방하고 각종 강연회와 음악회에 주민들을 초대하였다고 한다. 오산은 이승훈(이찬갑 증조부의 동생), 조만식이 꿈꾸는 이상촌 모습을 이뤄가고 있었다. “1925년경 용동을 포함한 오산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면 이렇다. 오산에는 학교 마을, 병원 마을, 사택 마을이 있었고, 학교를 남과 동으로 둘러싸고 용동 등 네 개 마을이 있었다. 거기에다 제석산 근처의 큰절골과 안절골, 그로부터 서쪽으로 좀 떨어진 당사니까지 합쳐서 모두 일곱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이중 용동 동회는 곧 자면회로 개칭되는데 문맹퇴치운동, 공동 경작제 시도, 소비조합 운영에 이찬갑이 큰 역할을 한다
이승훈, 함석헌과의 관계에 대해선, “일생 동안 이찬갑은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학교와 농촌 지역 공동체가 혼연일체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 소망은 이승훈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농촌에 이상촌을 건설하고 싶어한 이찬갑의 꿈은 함석헌과 공유되었으며, 그 뒤에는 홍순명(전 풀무학교장)에게로 오롯이 이어지고 있다”는 말로 정리했다.
이찬갑의 신문스크랩 메모 중 “소위 그 내선일체라는 말을 할수록 더욱더 조선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고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뿌리부터 뽑으려 하지 않았는가? 그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 땅 조선 안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 만주에 보내놓고도 거기서도 만주를 처음 점령할 적과는 달리, 일본인, 조선인이 사는 구역을 두며, 또 이 밖에도 조선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고 하지 않는가.”라는 구절은 일본의 위선적 태도를 꿰뚫어본 것이다. 이 강압적인 일본제국주의에 맞서는 방법은 깨어남뿐이고 그 깨어남은 제 나라의 역사와 말을 제대로 알아야만 된다는 게 이찬갑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백승종 저자는 이찬갑이 오산학교 야구팀 명투수로 일본학교인 평양중학 팀을 7:4로 꺾을 때 주역이었고, 조만식이 가장 기뻐했다는 내용도 전재한다. 제 역사의 제 말이 아니면 그 민족을 깨우칠 수 없다고 했던 덴마크의 그룬트비히가 조선의 지식인에게 준 영향을 언급하며 저자는 이찬갑이 조선의 그룬트비히가 되어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말로써 깊이 잠든 조선 민족을 일깨우고자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저자는 이찬갑을 두고 민족주의적이면서도 기독교 사회주의에 가까운 녹색주의자였다면서 이 모두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평민주의적 기독교 신앙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다. 그 근거가 되는 이찬갑의 육성을 옮겨 적는다.
“주께서는 여기에… 누구를 찾으실까? 그야말로 일상의 보통 생활자인 평민 민중이 아닐까? 무명의 사람, 누가 돌보지도 않은 민중, 외로와 울고 핍박에 슬퍼하는 자일 것입니다. 빚에 울고 주리어 슬퍼하는 자일 것입니다. 고아와 거지일 것입니다.
일상의 보통 생활,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하게 되기도 하는 민중의 생활, 그 평민주의는 진리입니다.”
그의 평민주의가 연탄가스 중독과 과로로 멈춰 서게 된 것이 안타깝지만 다른 누군가의 평민주의로 다시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고쳐 생각해본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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