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목어 / 김결

목어 / 김결 벚꽃의 정오,마른 물고기가 비늘을 털고 있다 공림사* 목어를 만났다등지느러미를 닮은 오색 파라솔이 바람에파닥일 때마다 쏟아지는 꽃 비늘야위고 헐벗은 하늘이 휑덩그렁하다 여섯이나 낳아 속이 텅 빈 목어단청의 물기는 주름진 시간으로 말라버리고수심을 알 수 없는 두 줄에 매달린 물고기등 굽은 척추의 허물만 남았다새벽이 올 때까지 편물을 짜던 당신붉은 죽비의 손으로꽃잎 하나에도 길을 열어 준다 벚꽃 잎 떨어져 하얀 혈해를 이룬김해내외동행정복지센터 주차장에서주차 관리하는 늙은 목어만차(滿車)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공림사 여백 속의 흔들림을 닮았다 *공림사: 충청북도 괴산군 낙영산에 있는 절.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 달아실, 2024. 감상 – 시인은 벚꽃이 지는 어느 날, 괴산 공림사에 왔..

감상글(시) 2024.08.10

노둣돌 / 방순미

노둣돌 / 방순미  동짓날 지는 해 짧아지듯어머니 다리가 그렇다 허리 굽어 오르기 힘든방문 앞 디딤돌 돌도 세월엔 장사 없어이젠 둘 다 뒤뚱거린다 -『물고기 화석』, 우리시움, 2024. 감상- 하마석(下馬石)의 우리말인 노둣돌은 ‘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에 발돋움하기 위하여 대문 앞에 놓은 큰 돌’을 뜻한다. ‘노둣돌’이란 단어가 익숙해진 건 문병란 시인이 쓰고 김원중 가수가 불렀던 노래의 영향이 커 보인다. 노래에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문병란, 「직녀에게」 중)란 시구가 나온다. 떨어져 있는 이쪽과 저쪽이 만나야 한다는 시 내용을 생각하면 노둣돌 대신 징검돌이 자연스러울 수 있으나 가슴에 얹히는 무게를 생각하며 노둣돌을 선택했을 것이다. 노둣돌이 원래의..

감상글(시) 2024.08.03

벽화 / 김윤환

* 배경 그림은 송성진 화가 작        벽화 / 김윤환 대문을 열고 왼쪽으로 돌아가면창고로 쓰던 반지하방을 월세 5만 원에몇 년을 옥살이처럼 산 적 있었다일터에서 돌아와 문을 열면어둠은 기다렸다는 듯 내 품에 안겼고나는 그것이 무서워창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가장 어두운 쪽에 창을 그리고 거기에 해를 그려 넣었다 쉬 잠들지 않는 밤이면어스름 꿈결에 어느 소녀가 창틀에 앉아햇살 같은 미소를 보내곤 했는데화들짝 놀라 눈을 뜨면촛농이 흘러내리듯 검은 창들이 온 방에 흘러내렸지들어오고 싶지 않은 방에도 달력은 있었고아무것도 적히지 않는 빈칸마다따라갈 수 없는 시인의 시를 채우곤 했는데시인과 흘러내린 창문과 어둠이늡늡한 노래가 되어 아침이면 내 등을 적시곤 했다 지금은 지상 위에 집 한 칸을 갖고 살지만 아..

감상글(시) 2024.07.27

여러 개의 그림자 / 김옥경

여러 개의 그림자 / 김옥경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가짙은 안개 속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꿈에 나타난 할아버지는 긴 칼로나의 그림자를 잘라내 버렸다 할아버지 안돼요내 그림자를 돌려줘요나는 할아버지를 쫓아가 보지만홀연히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다음날도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나의 그림자를 잘라버렸다전날보다 선명해진 할아버지의 모습이하얀 수염 사이로 내비친다 할아버지, 너무 무서워요제발 내 그림자를 돌려주세요긴 시간 동안 불안증에 헤매던 내게서 나의 그림자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떤 슬픔의 옹이를 만들려고내 상처는 이리 깊은걸까목표를 잃어버린 두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허공으로 자꾸만 두 손을 휘저어 본다 며칠 후할아버지는 잘라낸 그림자를 모아 불을 질렀다활활 타고 있는 저 불길 속한 움큼씩 먹어대던희고..

감상글(시) 2024.07.19

육화산 / 이종암

육화산 / 이종암 날이 새거나 어둡거나 상관도 없이고향집 대청마루에서 날마다고개 들고 바라보던 육화산(六花山)불혹도 한참 지나서야 처음 올랐네 산굽이 돌아서고 올라설 때마다저 멀리 발아래 내려다뵈는동창천 강줄기는 푸르게 웃으며내게로 달려오고강 가까이 옹기종기 사람들 모여 사는용전 길명 명대 북지 삿갈 호방마을들 여기저기 꽃처럼 피어나네 산봉우리 여섯 꽃잎처럼 둘러싸여얻은 이름 육화산인가?산에 함께 올라간 어릴 적 친구들종의 영자 용식 전열 명자 태봉이동무들은 모두가 오래 정든 산 같고꽃잎, 꽃잎, 꽃잎들만 같은데 확확대던 숨결 유야무야 싱거워지면우리도 저 육화산 속으로 들어가서, 끝내산의 부분으로 육화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 내통 위에 꽃은 또 피고 지고 -『꽃과 별과 총』, 시와반시, 2024. 감상 –..

감상글(시) 2024.07.11

달팽이 고리 / 신순임

달팽이 고리 / 신순임 소장가치 따질라치면 골동품점 가야겠지만한 시절 엄마 손에 놀아나던 것들이라눈요기로 행복지수 높이기에 이만한 것 없어일부러 들러 보는 안강장달아오른 아스팔트 위 목마름 잊고 모로 누워새 주인 기다리는 민속품 중녹슬고 때 눌어붙은 달팽이 고리돌돌 말은 몸속까지 햇빛 밀어 넣고말라버린 촉수에 기 모아누군가 알아봐 주길 고대하는데여인네들 잠자리 들기 전한옥 문고리에 숟가락 꽂던 때돌쩍 빼지 않는 한 열 수 없는 잠금쇠로쇳대도 필요 없이 요긴했지만디지털 도어락이 집 지키는 세월맘만 먹으면 열 수 있는 쇠붙이아무도 알은척 않으니스스로 달구어 가는 열기 범접할 이 없네 -『탱자가 익어갈 때』, 스타북스, 2023. 감상 – 신순임 시인은 양동마을 회재종택인 무첨당 안주인이다. 시의 양식을 빌려..

감상글(시) 2024.06.24

종달리 수국을 생각하는 밤 / 박숙경

종달리 수국을 생각하는 밤 / 박숙경 카페인에 덜미를 잡힌 잠이 잔금 투성이다낄낄대며 날뛰는 초침들 방안을 휘젓는다엎드렸던 적막이 뒤채다 흩어진다 가랑이 사이의 노묘(老猫)색 바랜 분홍 코를 앞발로 감싸고뒷다리를 한껏 잠 속으로 뻗고 있다나는 누운 채 분침처럼 천천히등을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춘다 짚은 손보다 이마가 싸늘하다, 나는 흘러든다 괜히 손가락이 가려운오늘 밤을 어디에 둬야 할까 나를 스쳐간 별의 이름은 무엇일까허기졌던 시간들을 비켜가는 방법으로 네가 왔을까이쯤이면, 꼬리가 꼬리를 무는 꼬리의 시간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나름 살아 있음을 알리는 둥근 등과 긍정적인 고요와 자정의 모퉁이를 넘어와 반비례인 쓸쓸함 문득 나에게 다가왔던 말과내게서 멀어져간 것들을 떠올리며비바람 치던 종달리를 생각한..

감상글(시) 2024.06.13

꽃바퀴 / 이윤경

꽃바퀴 / 이윤경 똑같이 생긴 자동차 바퀴를 뽑아내고그 자리에다 좋아하는 꽃잎을 끼워요자동차가 속도를 내면팽팽해진 꽃잎은 빙그르르 돌아요꽃잎을 끼운 자동차 꽁무니에선 꽃향기가 나지요도로는 꽃밭이 되구요급하게 끼어드는 자동차도빵빵거리며 화내는 사람도 없어요앞차 꽃냄새 맡으며 살살 달려요아빠 차 바퀴는 구름 같은 수국이구요옆집 아저씨 트럭은 힘찬 박태기꽃이구요 나중에 내 차를 가지면노랗게 와글거리는 산수유꽃을 끼울 거예요 -이윤경 동시, 나다정 그림, 『담쟁이는 문제를 풀었을까요?』, 브로콜리숲, 2002. 감상 – 이윤경 시인의 「꽃바퀴」를 읽으니 꼬마 자동차 붕붕도 자연스레 추억된다. 꼬마 자동차 붕붕은 1985년 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이고 그해 한국에서도 방송된 바 있다. 붕붕은 휘발유나 전기로 가는 ..

감상글(시) 2024.06.03

역전 사진관집 이층

역전 사진관집 이층 /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한밤에도 덜커덩덜커덩 기차가 지나가는 사진관에서낙타와 고래를 동무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아무 때나 나와 기차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갈 수 있는,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을 그 먼 곳에 갈 수 있는,어렸을 때 나는 역전 그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꿈이 이루어져 비행기를 타고사막도 바다도 다녀봤지만, 나는 지금 다시그 삐걱대는 다락방에 가 머물고 싶다.아주 먼 데서 찾아왔을 그 사람과 함께 누워서덜컹대는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 소리를 듣고 싶다.낙타와 고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 다락방을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싶다.그 사람이 날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어두운 그늘에도 젖고 눈부신 햇살도 쬐고 싶다...

감상글(시) 2024.05.24

측백나무 수문장 / 이상열

측백나무 수문장 / 이상열  집 앞을 지키는 수문장 둘 있다10년도 더 부렸지만 월급 한번 주지 않았다이를테면 고용승계라 할 수 있는데가타부타 말이 없다상냥한 미소나 친절한 인사 그런 건 바라지도 않지만기분 좋게 취한 날이나 더럽게 취한 날, 더러멱살 잡고 삿대질 해댄 적 있었다 볕뉘 고운 어느 해 봄낮술에 취해 “야! 목석 같은 자슥아!” 할 때도아지랑이 바람에 간들간들 알 수 없는 표정만 짓거나 작달비 쏟아지던 여름밤 한마디 대꾸도 없이 폭풍 주사(酒邪)를 다 받아주고귀때기 시퍼렇게 한설이 몰아치던 섣달그믐서럽게 길던 소울음도 어제 일인데 짙은 민무늬 전투복은 어디 가고해지고 바랜 누추한 근무복 입고꼿꼿하게 기립해 있는 화분 속측백나무 두 분(盆) “근무 중 이상 무!” -『세 그루 밀원』, 애지, ..

감상글(시) 2024.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