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쥐버릇 / 심수자

쥐버릇 / 심수자 뚫어놓은 수챗구멍에서 느닷없이 고개 내민 쥐가 웃는다 아차, 지난겨울 잊고 있었던 윗목 고구마 자루를 여니스르르 끌려 나오는 반세기 전 기억 하나젖이 모자라 낑낑대던 세 살박이 막내는 한밤중 캄캄한 어둠 속에서고구마 양손으로 잡고 생쥐처럼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그때 벗겨 낸 껍질은 흩어지는 마른 울음 같아서얼굴 늙어 가며 듬성듬성 생겨난 검버섯주렁주렁 고구마 매단 넝쿨이 당겨져서언니 언니 나를 부른다 일찍이 본능의 씨눈을 삼킨 아이는철든 후에도 자주 손톱을 물어뜯고 하였다 가늠 되지 않던 생의 골짜기에서도 이빨만큼은 언제나 빛났다빠져나가라고 뚫은 수챗구멍에서내 눈으로 건너온 쥐는 앞니 유난히 하얀 소설이 되어갸우뚱 엿보던 나의 비밀을 갉고 있다 - 『술뿔』, 책나무, 2014.  감상 ..

감상글(시) 2024.05.15

눈물로 지켜야 하는 것 / 류흔

눈물로 지켜야 하는 것 / 류흔 정조는 지켜야 하는 것이다궁녀로부터 정조를 지킨호위무사도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이 점은 나의 신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여러 애인과상통하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밤에그러니까 억수로 취한 밤에어쩌지 못하고 당하던 그 밤에호위무사 한 명 없는 처지를 한탄하며 꺼이꺼이 동틀 때까지 나는 울었다달리아 비누 냄새와 뒤집어진내복에 관해 추궁받기 전에다락같은 가마 속으로 숨어들어광화문에서 화성(華城)까지 정조와 함께 수백 년을 흔들리고 싶었다나오라!성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아내여성문은 절대 열지 않으리먼 훗날 성이 허물어져단란했던 돌이 틀어지고바람에 흩어져 모래가 될지언정나는 마음의 순결을 피력하리지켜야 하는 생활과지켜야 하는 밤과지켜야 하는 역사를 생각하면 아으눈물이 앞을 ..

감상글(시) 2024.05.06

매듭 / 한상호

매듭 / 한상호 홀쳐매지 마라 다시 풀기 어려우니 해결이란 묶인 것을 푸는 일 화해란 풀리고 녹아 물로 흐르는 일 분노한 손으로는 매듭짓지 마라 잘 풀려야 잘 묶은 매듭이니 -『어찌 재가 되고 싶지 않았으리』, 책만드는집, 2023. 감상 – 매듭을 잘 짓고 싶다. 누구든 그러할 것이다. 한때는 단단하게 매듭짓는 것이 매듭의 존재 이유에 충실한 것이라 여기고 남보다 성의껏, 잘 잡아매는 것이야말로 실속 있는 태도인 양 여겼다. 삶의 태도도 그렇다. 맺고 끊는 것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인간적 결함으로 보는 시각이 적잖다. 결정을 미룬 채, 딱 부러지게 매듭짓지 못하는 것을 두고 우유부단하다고 스스로 자책하고 남도 나무란다. 시인은 이러한 인식을 애써 부정하는 대신 매듭의 또 다른 면을 통찰해서 우리에게 들..

감상글(시) 2024.04.14

331미터 앞 막국수집 / 강만수

331미터 앞 막국수집 / 강만수 331미터를 천천히 걸어가 막국수집에 들렀다 그 길은 평탄한 길이다 331미터는 어떨 땐 가깝게 여겨지지만 근거리라고 생각되지 않고 331미터는 멀다 아주 멀게 느껴졌다 7월 14일은 매우 흐린 뒤 비가 내린 날이었지만 손에 쥔 방울토마토 11개를 씹으면서 걸어갔다 길가 어느 집 담장 안 빨랫줄에 걸어놓은 빨간 셔츠와 노란 셔츠가 바람에 펄렁인다 그 집을 펄렁이는 난닝구와는 관계없이 지나간다 집 앞엔 흰 고양이와 검정고양이가 비를 피하고 있다 걷고 또 걸었지만 331미터는 줄어들지 않고 331미터는 3311미터처럼 느리게 다가온다 그러다 어떨 때는 331미터가 3311미터처럼 생각됐다 여름엔 그 길이 멀다고 느꼈지만 가을엔 당겼다 놓은 고무줄처럼 가깝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감상글(시) 2024.04.01

적막한 하루 / 천영애

적막한 하루 / 천영애 적막한 하루였습니다 주책없이 까치집 짓는 것에 참견하고 싶었습니다 위로만 올라가는 까치 불러 굴뚝 낮은 어디쯤 바람 피하기 좋은 어디쯤 집 지으라고 참견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색시 구해야 숭덩숭덩 알을 잘 낳는지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굴뚝 여기저기 헤매는 까치 보다가 바람의 일에도 참견하고 싶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은 조용조용하게 다닐 것 자리 찾지 못하는 까치집 흔들리지 않도록 조용조용 지나갈 것 길 내고 싶다면 좀 멀긴 하지만 돌아가라고 참견하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적막하여 내리는 눈에게도 말 걸고 싶었습니다 그대가 다녀온 길 고요하였는지 이 밤에 무슨 일로 적막한 도시 왔는지 적막한 하루였습니다 종일 뒤적이던 문자를 눈과 버무려 여기저기 던져 놓으면 말이 될까요 그 말에 적막의 냄..

감상글(시) 2024.03.27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 손현숙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 손현숙 비 오는 날 빨간 구두를 신는다 골목을 기웃거리는데 창문마다 작은 쇠종을 매달았다 소리 속에서 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졌다, 세상에서 이름을 찾다가 세상 밖으로 미끄러진 아이는 어디 가서 저를 찾아와야 하나 굽이 닳아서 발목까지 사라지는 꿈, 따뜻하고 말랑한 구름을 입에 물고 이 없는 잇몸으로 오물거리는,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뱃바닥으로 기어서 달빛까지 닿으면 길이 끝나는 걸까 누가 나를 부르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팔목을 저으면서 따라오는 빨간 구두는 언젠가 만났던 얼굴이다 오늘은 종일 비가 오고 그 비를 다 걷고 나서야 쇠종처럼 흔들리는 내가 보인다 - 『멀어도 걷는 사람』, 리토피아, 2023. 감상 – 카렌이란 친구는 단정해 보이는 검은 구두 대신에 빨간 구..

감상글(시) 2024.03.24

어수룩취나물 / 허림

어수룩취나물 / 허림 미역취 미나리싹 쑥 어수리를 뜯고 산비탈에서 두릅 따다 들켰다. 거기서 내려오세요. 왜요? 내려오세요. 당신 거 아니잖아요. 그럼 당신 건가요? 네. 미안해요. 몰랐어요. 내 것 아니면 손대지 말아야죠. 어서 내려와요. 혼내실 건가요? 그럼 안 내려갈래요. 왜요? 혼내실 거잖아요. 일단 뜯은 거나 봅시다. 그냥 보내줄 거죠? 내려와서 얘기하자구요. 내려오면서 그 뒤에 있는 두릅 두 개도 따가지고 내려오세요. -『다음이라는 말』, 달아실, 2023. 감상 - 헷갈리는 식물 이름이 한둘일까 마는 그중에서도 산형과 식물이 더 그렇다. 산형과는 꽃대의 끝에서 많은 꽃이 방사형으로 뻗은 모습인데 미나리, 뚝갈, 구릿대, 바디나물, 등골나물, 어수리 등 국내에서만 80여 종을 이룬다고 한다. ..

감상글(시) 2024.03.16

오래된 칼 / 이향지

오래된 칼 / 이향지 부엌에 있습니다. 부엌칼입니다. 날 끝에서 손잡이까지 5촌쯤 됩니다. 제 날은 두껍습니다. 손잡이가 헐거워져 부목을 대고 칭칭 철사를 동였습니다. 여기저기 이빨이 빠지고 긁힌 자국들이 자우룩합니다. 제겐들 왜 촌철살인의 의지 없겠습니까? 저는 죽은 고기들이나 썹니다. 죽어서 부뚜막까지 밀려온 것들이 무덤의 문턱을 먼저 알아봅니다. 날렵한 날을 섬광 속으로 디밀고, 눈앞의 공기를 썩썩 베며 번쩍이고 싶은 욕망, 제겐들 왜 없겠습니까? 제 날은 무겁고 짧습니다. 죽은 고기들이 투박한 날을 이리저리 피하며 애를 먹일 때마다 남은 날을 가혹하게 칼갈이에 들이댑니다. 오른손으로는 칼을 잡고 왼손으로는 칼갈이를 잡고 이날 저 날 뒤집어가며 쓱쓱 문질러 이 빠진 날들을 일으켜세우는 겁니다. 제 ..

감상글(시) 2024.03.07

우체국에 가면 / 신정일

우체국에 가면 / 신정일 아무도 밟지 않은 길마다 눈 내리고 잠시 멎었다가 다시 퍼붓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휘젓고 지나갈 때마다 산자락에서 하얀 송홧가루 날리고 나무마다 하얗게 하늘 바라기를 하는 섬진강 강물이 여울져 흐르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강가에서 겨울의 소리인가 봄의 소리인가 모를 낌새를 느끼다가 적성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가 창구에 앉은 여자분에게 물었다 삼십 년 전인가 이십여 년 전이던가 맡겨둔 걸 찾으려고 왔습니다 똥그란 눈으로 묻는 여직원, 예금인가요? 아니요, 그리움입니다 잊으면 안 될 그리움을 맡겨두었거든요 그제야 빙긋이 웃던 그 여직원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꿈,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소망을 찾을 수 있을까? ㅡ『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 작가, 2023. 감상 – 위 시의 한 구절처..

감상글(시) 2024.02.26

애써 아닌 척 / 유은희

애써 아닌 척 / 유은희 다른 색을 칠했다고 네 맘이 숨겨지겠니? 옆구리에 작은 벨까지 차고 안 기다린 척은 몇 번을 고쳐 채운 자물쇠 자국 좀 봐 이미 너도 흔들리고 있었잖아 ㅡ『수신되지 않은 말이 있네』, 애지, 2023. 감상 – 아닌 척 긴 척. 이때 ‘척’은 그럴듯하게 꾸미는 거짓 태도나 모양을 일컫는 말이니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가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적 의미는 분명 그러하지만 진실이란 게 뚜렷하고 적확한 형태로 있는 게 아니다 보니 한 쪽이 분명하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 오히려 불편해지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두려움을 이겨내며 언제든 진실 편에 서려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헌신이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꾸어 왔다고 믿지만 그 반대편 사람들도 자신을 진실의 편이라고..

감상글(시) 2024.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