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독작 / 나석중

독작(獨酌) / 나석중 목련은 어떤 지극한 마음으로 꽃을 향해 가는지 꼿꼿이 세운 그 꽃봉오리 끝으로 나 속절없이 당신에게 안부를 적고 싶네 텁텁한 막걸리 한 병이면 당신을 사흘 견디네 돼지고기 한 근 끊어 김치찌개를 끓일 때 문득 당신이 찾아오네 그러나 아주 가끔 하루 한 잔으로 족하네 당신은 팔부 능선쯤 차오를 때 제일이네 외로움도 아껴야 해 나 외로움을 너무 낭비하는 게 아닌지 넉넉히 차오른 당신을 굽어보는 동안 어느새 낮달처럼 떠오르는 당신은 웃는지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달래주는 오늘 당신은 나의 반주라네 -시선집 『노루귀』,도서출판b,2023. / 『목마른 돌』(2019) 감상 : 독작이란 제목의 시가 많은 줄 안다. 술을 하든 안 하든 독작이란 제목 자체가 삶의 한 구경(究竟)에 가 닿아 ..

감상글(시) 2023.10.01

미녀이거나 마녀이거나 / 전선용

미녀이거나 마녀이거나 / 전선용 보이지 않는 곳까지 봤다는 말은 기망(欺妄)이다 양귀비가 가진 힘이 중독성이라면 아편은 지옥문이 열리는 무덤, 손톱 밑에 혀를 밀어 넣고 독을 빠는 동안 별은 창틀에 끼어 급사했다 황홀하게 익숙한 밤 마법에 걸린 연애 습성은 마약과 같다 점 하나를 숨기고 유유히 바다로 간 미녀 해무가 그녀라는 소리가 있고 수평선이 그 여자라는 전설이 있다 파랑을 견뎌낸 섬 환락의 껌을 씹는 마법은 착란이었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계(界) 문장의 비문처럼 난해한 점의 출처가 사내에겐 못이 됐다 저기 점 박힌 여자, 여기 못 박힌 남자, 꽃 지고 난 자리 시체 투성이다 -『그리움은 선인장이라서』, 생명과문학사, 2023. 감상 - 「미녀이거나 마녀이거나」는 남해 여행 중에 구상한 시라..

감상글(시) 2023.09.17

소림사의 광두일귀

소림사의 광두일귀 무림일기9 / 유하 단 일 검으로 삼 장 거리의 나뭇잎까지도 베어버린다는 공전절후한 필살 검법의 소유자 건곤일검 호용비도 자신은 검법의 검 자도 모른다며 소매를 휘휘 저었다 공수도 한 방이면 온 무림을 시산혈해로 만들 수 있다던 냉면나찰객 왕쇠도 불초는 그런 말을 해서도, 할 수도, 한 적도 없었다고 뜨거운 차 한잔 마실 동안이나 홍알댔다 이렇듯 일세를 풍미한 고수들의 오리발 검법이 난무하는 가운데 열린 무림 청문대회 그러나 정작 모든 재앙의 장본인인 광두일귀는 삶은 만두피 하난 만진 적 없다는 그의 처 독서시 염자홍과 함께 한때 그가 탄압했던 소림사에 은거하며 공수무극파천장의 독랄하고도 광오한 구결 대신 공즉시색 색즉시공을 끝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림사의 허망함과 함께 깊어가는 소림..

감상글(시) 2023.09.09

위험한 길 / 강우현

위험한 길 / 강우현 한때 곁길로 가던 나뭇가지들 톱날이 간섭하자 다시 길을 찾았다 나무의 길은 하늘에 있었다 겨울잠을 깬 어린 나뭇가지 하나 옆구리에서 불쑥 튀어나와 길 아닌 길을 걷고 있다 저것은 위험한 길 바람의 눈이 반쯤 감기자 아직 나무의 길을 익히지 않은 애송이가 철없는 아이처럼 반항하고 있다 함께 할 수 없는 저 길 찔려본 사람들은 다시 톱날을 들이댈지 모른다 작년 옆 나무에서 잘린 가지 하나도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꽃을 피우고 갔다 가고 싶은 길은 그렇게 목숨을 걸어야 한다 -『반항을 접은 노을처럼』, 우리시움, 2023. 감상 – 가로수는 곧잘 가지치기 대상이 된다. 이유도 다양하다. 가로수가 가게 간판이나 차량이 오가는 것을 가린다든지, 비바람에 찢어진 가지가 도로를 덮쳐 위험할 수 ..

감상글(시) 2023.07.27

개밥 / 박광영

개밥 / 박광영 시골집에 가면 제일 먼저 이름을 부른다 소리치면 큼지막한 꼬리 흔드는 소리 성큼 대문 틈새로 주둥이를 내밀고 낑낑거린다 나는 여태 어느 누구에게도 저렇게 거한 환영식을 열어 본 적이 없다 지나가는 인연에게 미세한 칼날 조각 하나 찔릴까 두려워했다 개는 제 밥을 나눌 줄도 안다 까치에게 밥을 빼앗기듯 하지만 결국 함께 살자며 공양하는 것이다 늘어선 까치 떼 한 마리가 공양을 마치면 다른 한 마리 차례로 들어선다 늙은 개는 쪼그리고 앉아 멀찌감치 구경만 하고 있다 까치를 키우는 것인지 개 한 마리 키우는 것인지 그동안 밑지지 않으려 살았다 모래폭풍이 쓰나미처럼 내리꽂는 내 입속은 늘 꺼끌거렸다 오늘 모기에 여럿 물린 종아리 물파스를 바른다 무정형의 붉은 반점은 죽기 살기로 붙어 뜯어먹은 흔적..

감상글(시) 2023.07.20

해당화 향기 / 임미리

해당화 향기 / 임미리 그림자도 숨어버린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람을 찾아 나선 선정암 입구에 들어서니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 진동하네. 두리번거리다 마주친 해당화 한 무더기 척박한 모래땅 바닷가에서만 꽃 피는 줄 알았는데 정인을 만난 듯 반갑게 마주앉네. 산사의 바람에 얼마나 흔들렸을까. 붉은 꽃잎이 더욱더 애잔해 보이는데 그리운 이를 기다리는 듯 강인하게 피었네. 산 넘고 바다 건너 먼 곳까지 아련한 향기 한 줌이라도 보내려했을까. 붉은 꽃잎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그늘이 보이네. 푸른 가시로 버텨낸 세월이 얼마였을까. 보는 이의 아련함 깊어 가는데 바람결에도 모른 척 잠이 드는 해당화 내일쯤이면 찾아올 그리운 이의 발치에서 더욱더 붉게 피어날 꽃잎 무더기 향기로운 몸짓이 산사를 흔들어 깨우네. -『물..

감상글(시) 2023.07.12

유령놀이 / 나문석

유령놀이 / 나문석 극락강을 건너온 눈바람이 온 누리 하얗게 칠하는데 창가에 선 백발의 어머니, 밤새도록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다린다 누워서 기다려도 오신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 지나가는 기차소리에 놀란 눈으로 통근열차 놓치면 작업반장한테 혼난다고 안달하는 어머니 도시락 가방을 챙겨 들고 기어이 방문을 나서려고 한다. 동이 트려는지 창밖이 밝아지기 시작하는데 태어나기도 전의 날들이 굵은 눈발이 되어 허공을 가득 채우고 울 엄니 내일 아침에 시집간다고 새색시 화장을 시작한다 * 영산강과 황룡강의 분기점에서부터 광주천이 나누어지는 지점까지를 극락강이라 부른다. -『정삼각형 가족』, 시와에세이, 2014. 감상 – 시인의 아버지 나경일 선생은 제일모직 노조 설립과 운영에 애쓰다가 고초를 겪었던 노동자이자 노동 ..

감상글(시) 2023.07.06

소한 / 도경회

소한 / 도경회 녹내장에 걸린 저수지 살얼음 반 너머 깔린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따뜻한 운석 얼음에 쩡 금이 간다 밤 깊을수록 하늘 팽팽해지고 풍덩 풍 잔 메아리 일구며 돌 떨어지는 소리 잦다 물이 가슴 뚫리면서 너울에 솔개바람 인다 목숨의 둘레를 돌려가며 갑옷 구멍처럼 홀쳐서 찢어지지 않게 깁고 있다 무리를 이끄느라 피멍 든 죽지 세상 후미진 밑바닥 훑어서 밥 벌어오던 아버지 -『데카브리스트의 편지』, 우리시움, 2022. 감상 – 24절기 중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은 마지막에 놓이며 이름에서 보듯 가장 추운 날에 해당한다. 북쪽의 작은 저수지라면 꽝꽝 얼 때가 많지만 남녘의 저수지도 영하의 날씨에 살얼음 끼는 건 종종 보게 되는 일이다. 살얼음은 그리 단단한 얼음은 못 되는 것인데 운석이 자꾸 부딪..

감상글(시) 2023.06.27

모듬살이 / 김병해

모듬살이 / 김병해 올해도 마당귀 들꽃 더미 여럿 담뿍 어름더듬 곁을 넓혀 무람없이 들어앉는다 해마다 들이미는 해사한 낮은 호명 들며 나며 눈인사만 멀찍 건넸댔는데 여러 해 어깨맞춤하며 마주하다 보니 꽃문 여닫는 시기며, 본곶은 어디인 것 하며 새새틈틈 드는 길손, 바다 구름 벌 나비랑도 살가운 안면 트는 막연지간이다 싶어 입때껏 너나들이하며 두루뭉술 한집살이 맹랑한 무단잠입 내내 눈감아 줬더니 글쎄나 그새 거푸 슬하 식솔 여럿 불려 흔전만전 붙박이로 눌러앉을 모양이네 이참 만부득이 집세 솔찬히 받아낼까 보다 얼추 어림셈해도 곳간 꽤나 두둑하겠네 허나 어쩌랴, 나 또한 저들과 어금지금 이곳 별 잠시 들른 무전취식 모듬살이인 것을 -『오늘은 너에게로 진다』, 문학의전당, 2023. 감상 – 시인의 집 마당..

감상글(시) 2023.06.18

연백촌가 / 조지훈

연백촌가(延白村家) / 조지훈 수숫대 늘어선 밭뚝길로 몰아 놓은 트럭은 배추밭 머리를 돌아 울타리 뒷길을 돌아 어느 촌가집 마당에 멈춘다. 젊은 중위가 뛰어내려 어머니를 부르니 뜻아닌 목소리에 가족이 몰려나와 서로 껴안고 울음 반 웃음 반 어쩔 줄을 모른다. 알고 보니 이 중위는 사년 전에 달아난 이 고장 젊은이 때 묻은 융의(戎衣)를 입고 와도 금의환향이 이 아니냐. 한잠 든 닭을 잡아 모가지를 비틀고 둘러앉아 한 그릇씩 국수 잔치가 푸지다. 내 뜻 아니한 이 촌가에 와 그 즐거움을 함께하노니 반가운 손이 되어 아랫목에 앉아 웃는 인연이여 흐린 하늘에서 달빛이 다시 나온다 평양 가는 트럭에 뛰어오르니 밤은 삼경! 사랑하는 자식을 하룻밤이나마 못 재워 보내서 안타까운 그 어머니를 생각한다. 아 우리나라 ..

감상글(시) 2023.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