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일화

김용준(1904-1967, 대구)

톰소여와허크 2010. 9. 4. 11:52

김용준(1904-1967, 대구)


일제 암흑기와 해방공간의 혼란기를 살았던 문화예술인들 중에서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서양화를 두루 그렸던 화가이자 해박한 미술이론가로서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를 지냈던 근원이 화단에서 뚜렷한 활동을 남긴 탓이기도 하겠지만, 미술계 밖에서는 오히려 아름답고 고아한 글 솜씨를 지닌 빼어난 문장가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납·월북 문화예술인들의 해금 이후 김용준이 1948년에 남긴 《근원수필》이 40여년만에 다시 발간되어 읽히고 있다.

미술사적으로 좁혀서 보면, 근원 김용준의 업적과 비중은 근대 화단에서 활동했던 그 누구보다도 돋보인다. 그는 1920년대에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했던 한국 양화의 제1세대 화가로 귀국 후 일제강점기의 조선 화단에서 민족미술운동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론과 예술적 실천 양 측면에서 미술계를 이끌어갔던 정신적 리더였다.


김용준은 1904년 2월 2일 대구에서 한 평민의 2남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용준(瑢焌). 그의 부친은 농사를 지으면서 한의치료도 하였다.

김용준은 1921년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빼어난 재능을 가진 우등생이었음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는 재학시절의 성적이 전교에서 2등을 차지할 정도로 수재였으며, 특히 도화(圖畵), 음악, 한문 과목이 우수했다.

그가 신교육을 받으면서 이젤과 석고상을 접하게 되고 결국 본격적인 양화지망생으로 입문하게 된 것은 설초 이종우(雪焦 李鍾禹)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고희동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네 번째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양화의 선각자이자 개척자였던 이종우는 1923년에 귀국하여 중앙고보에 일종의 특별활동 수업을 위한 도화교실을 개설하였다.

이 아틀리에에서 김용준은 미술에 뜻을 둔 서울 장안의 고보생들과 함께 이종우의 지도를 받으면서 밤늦도록 그림을 그렸다. 당시 김용준과 함께 양화를 익혔던 학생들 중에는 뒷날 걸출한 화가로 성장한 이마동(李馬銅) 길진섭(吉鎭燮) 김주경(金周經) 구본웅(具本雄)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용준의 화단 데뷔는 고보 4학년 때였던 1924년 제3회 조선미전에 〈동십자각(東十字閣)〉을 출품, 입선하면서부터이다. 이종우의 회고에 의하면,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건설이냐? 파괴냐?〉였다. 그리고 뒤에 이 그림을 인촌 김성수에게 갖다 주고 김용준의 도쿄 유학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고 하다. 이 작품은 경복국의 동십자각을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짓는 공사 광경을 그린 것이다.


김용준은 1924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동경미술학교의 기록에는 1924년 수업료 미납으로 제적되었다가 1931년에 졸업한다. 김용준은 동경미술학교 졸업 작품으로 달리는 기차가 전복되는 작품을 그렸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상을 그렸다고 하여 일제 경찰에 압수당하였다. 동경시절에 만난 이태준과는 동갑내기로서 [문장]지 시절에 이르기까지 절친한 친구 사이로 지냈다.


김용준은 1931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그는 모교인 중앙고보에서 미술교원으로 있었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일제 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전을 거부하고 서화협회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그리고 1934년 양화계의 중진과 신예 중에서 조선미전을 외면하던 이종우 장발 임용련 등의 선배와 길진섭 구본웅 등 동년배의 화가들과 민족적 자주의식의 양화운동을 지향했던 목일회(牧日會)에 가담하게 된다. 김용준은 193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미술사 연구에 관심을 쏟게 되면서 더 이상 유화 작업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양화가로서 김용준의 위치는 사실상 1940년 이전에 끝난 셈이다.


김용준이 성북동에 들어간 것은 그의 「노시산방기」로 가늠해볼 때 1935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지금 내가 거하는 집을 노시산방이라 한 것은 3, 4년 전 이 군(이태준)이 지어준 이름이다. 마당 앞에 한 7, 80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 감나무 2, 3주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우는 것이 나로 하여금 얼마나 위로를 주는지….”

그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넘겨준 것은 1944년 무렵이다. 김환기는 김용준보다 아홉 살이나 어렸지만 친하게 교유했다. 그 무렵 이태준도 철원으로 내려가고 없어서인지 그 역시 노시산방을 팔고 의정부로 들어갔다. 그 이야기가 「육장후기」란 글에 나온다. 어느 날 김용준이 수향산방으로 바뀐 예전의 노시산방을 찾았더니 김환기가 이 집을 4만원에 팔라는 작자가 생겼다면서 김용준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김용준은 노시산방을 팔고도 미련이 많이 남았던지 자주 김환기의 수향산방을 찾았던 모양이다. 그 당시 그곳에서 그린 작품으로 현재 종로구 부암동 자하문 터널 위쪽에 위치한 환기미술관에는 「수화 소노인 가부좌상」과 「수향산방 전경」이 소장돼 있다. 수화소노인가부좌상은 가부좌를 틀고 있는 김환기를 그린 것이고, 수향산방전경은 수향산방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수화 김환기가 “뭐 하나 장난해주시라”고 하며 먹과 붓을 건네자 김용준이 싱끗 웃으면서 그려준 그림이 <수화 소노인 가부좌상>이다.


양화가로서 화단에 진출했던 김용준이 전통 수묵화에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서울의 모교 중앙고보에서 도화(미술)교사가 된 때부터였다고 한다. 습자(붓글씨) 시간도 맡게 되어 교육상 스스로 서법(書法)을 익혀야 했던 그는 서화협회전 참가를 통해 접촉했던 당대의 명망 높은 서예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한편, 사군자(四君子) 범위의 전통 묵화도 손대다가 종당 양화 작업은 아예 저버리고 전통적인 수묵화가로 변신하게 된다. 특히 한국미술사 연구 생활 속에서 전통 수묵화의 사상과 본질을 깊이 터득하고 그러한 수묵화를 즐겨 그렸다.

일제 말기부터 김용준은 본격적인 한국미술사 연구에 몰입하여 우리 민족의 고전 작품을 탐구하고, 서화 골동품과 민족의 문화유산에 대한 높은 안목과 식견을 쌓게 된다. 그가 1930년부터 주장해온 서구미술과 동양미술의 학구적 연구를 통해 민족미술의 방향을 찾아야겠다는 그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여진다. 이 시기부터 미술사 글을 많이 남기고 있다.

8. 15해방은 일제 식민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 독자의 미의식을 세울 전기였다. 은인자중하고 일제 말기를 민족미술의 모색을 위해 보냈던 김용준이 서울대 교수로 임명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 학교에 재직하면서 전통화론과 한국미술사 강의를 맡았다. 그가 모색하고 교육시켰던 전통화의 교육 방법은 이른바 신문인화(新文人畵)라고 할 수 있는 묵법(墨法) 중심의 화풍이었다.

김용준은 1947년 서울대를 퇴직하고 동국대로 자리를 옮길 무렵 그동안의 미술사 연구를 정리하여 《조선미술사대요(朝鮮美術史大要)》를 저술했다. 그 자신은 ‘넝쿨만 있지 꽃이나 열매는 없다’고 평했다는 이 책은 해방 이후에 발간된 첫 미술사 서적이었다.


해방 이후 김용준은 정치적 활동이나 좌익 미술단체에 가담한 일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6·25가 발발하자 서울대 국대안 반대운동으로 수감되었다가 출옥한 미대생 김진항의 추대로 일시 서울대 예대 임시 과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9·28수복 때 북으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언에 의하면 그의 부인이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북으로 간 김용준은 1953년까지 미술대학 조선화 강좌장으로 있으면서 미술 교육에 힘썼다. 조선화 실기를 담당하면서 이론 작업과 집필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조선화 기법〉(1960), 〈조선화 채색법〉(1962), 〈단원 김홍도〉〈고구려벽화 연구〉 등을 저술을 남겼다. 1951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 조선건축가동맹 중앙위원을 맡기도 했다.

월북 이후에 김용준은 〈황금벌〉 〈김일성 원수〉 〈로야령〉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시며〉 등 김일성의 혁명 활동을 형상화한 작품을 그렸으며, 〈옥수수〉 〈단장하는 대동강〉 등 순수한 작품도 남겼다. 민간 무용의 한 장면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춤〉(1957)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춤〉은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금메달을 수여 받았다. 이 작품이 사회주의 여러 나라를 순회 전람회에 나가 뽈스카에 전시되었을 때, 이 나라의 노예술가는 그림의 신비한 예술적 형상에 감탄한 나머지 모자를 벗고 절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김용준의 죽음을 전한 사람은 성혜랑이다. 유럽을 통해 망명한 성혜랑은  2000년에 『등나무집』이란 책을 내놓았는데, 거기에 김용준에 대해서 꽤나 아는 체를 하고 있다. 감색 더블 외투에 자주색 머플러를 하고 초콜릿 색 중절모에 초콜릿 색 안경을 끼고 길을 걷던 신사였다고. 북조선 50년 역사에 다시 보고 죽으려 해도 못 볼 것 같은 세련된 품위의 신사였다고. 그러나 모진 소낙비를 잘도 피하며 그 시절을 견뎌냈는가 싶더니, 1967년에 자살했단다. 그 이유가 참으로 어이없다. 어느 날 김일성 초상이 있는 신문을 그대로 폐지로 내놓았는데, 김일성 초상화는 잘 오려서 보관하는 게 그쪽 법이란다. 결국 처벌이 두려워 지레 겁먹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성북동 노시산방의 주인으로서 참으로 믿기 힘든 코미디 같은 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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