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포에서 - 양연옥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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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窓) 이야기 / 이동훈
경사 따라 기우듬한 집, 낮은 창은
저녁이면 형광등 아래 고깃점 같은 남루를 걱정하는
비리비리한 자존심이었다.
지붕과 담벼락 사이를 핥고 오느라 기진해진 빛은
발바닥만 한 창에 걸렸다가
유년의 발치에 매가리 없이 쓰러지곤 했으니
그때부터 나는 바닥과 고요와 어둠에 익숙해졌겠다.
창을 열어도 별 볼일 없거나
베니어판으로 창을 봉하기도 하는 곁방살이로
주소지가 매번 바뀌어 갔으니 빛은 늘 미미했다.
외지로 나가 밥벌이하고서야 벽 한 면이 창인 집을 얻어
밀린 빚 같은 빛을 한꺼번에 다 받는데
그 창으로 도둑이 들어
환한 햇살에도 눈살 찌푸릴 일 있다는 걸 배워야했다.
창 많은 교무실에 적을 둔 것도 빛에 주린 보상일까.
한 줄기 햇살에 손가락을 얹으면
설레발치던 빛이 야단치는 이맛살에도
반성문 쓰는 뒤통수에도 주름 없이 뿌려진다.
바닥에 널린 토요일 오후 같은 마음이
커튼 치는 쇳소리에 금세 어둑해졌어도
창은 아직, 모서리 햇살 꼬리를 놓지 않고 있다.
* 우리는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속성을 가졌다. 늘 빛을 보고 살지만 어둠 밖의 밝음에만 익숙하고, 세상적인 이름과 겉모습에 더 익숙해져 있다. 화려하고 환한 빛 속에 눈살 찌푸릴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으면서도 바닥과 고요와 어둠을 두려워하고 회피한다. 외형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는 탓에 우쭐거림과 불신, 원망과 회한을 겪게 된다. 그러나 어떤가? 바닥과 고요와 어둠의 겉모습은 곤궁과 우울이지만, 그 내면은 평평하고 잠잠하다. 조용한 묵상과 소망이 있고, 겸손의 미덕을 배우게 되는 곳이다. 바닥과 고요와 어둠에 익숙하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안목과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며, 스스로 낮아질 줄 안다는 것과 통한다. 이는 성장 뒤에 오는 성숙과도 통한다.
시인은 햇빛을 한껏 받아들이는 창 많은 교실에서 한 줄기 햇살에 손가락을 살짝 대보는 겸손한 선생이다. 야단치는 이맛살에도 반성문 쓰는 뒤통수에도 주름 없이 뿌려지는 햇살 한줄기에 토요일 오후 같은 마음이 바닥에 널렸다고 한다. 작은 것에도 고마워 할 줄 아는 선생이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묵상할 줄 알고, 스스로 낮아질 줄 아는 품성을 지닌 성숙한사람이다. 이는 빛에 주린 유년을 보낸 덕분이 아닐까?
빛의 진정한 밝음이란 바닥과 고요와 어둠을 수용한 밝음일 것이다.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 진정한 밝음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은밀한 속내까지 포함된 저마다의 색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빛 속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유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