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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 민구식

살구 / 민구식 살구나무 집 손 씨 할매 마루 끝에 앉아 꽃비 바라본다 저 나무 심을 때 둘째 딸 낳고 시아버지가 심심해하면서 심은 건데 내리 셋이나 더 딸을 낳으니 그만 뽑아 버리려는 것을 큰딸이 매달리고 말려서 살아 있는 것이라고 씁쓸히 웃으신다 그 딸이 시집을 가서 또 딸만 셋이여 ‘삼 일만 살구〜’라고 해서 살구꽃이라든가 ‘삼 년만 살자’고 해서 살구꽃이라든가 눈 한번 잘못 돌리면 꽃구경도 못 하는 살구꽃은 여우비 내리듯 우산 펼까 말까 하다가 지고 마는 절정이 짧다 떨어진 것들만 주워 먹는 살구는 열매마다 멍든 상처가 깊다 기구한 팔자가 살구꽃 같다면서 “내년에도 내가 살구꽃 볼려나〜” 살구 팔자 같은 할매 한숨이 길다 -『자벌레의 성지』, 시산맥사, 2022. 감상 – 살구나무를 뜻하는 한자어..

감상글(시) 2023.02.08

<소설>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나무옆의자, 2021. - 노숙자(老宿者)는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란 뜻이지만 집이 없어서 생긴 문제임을 더 뚜렷이 보여주는 홈리스(homeless)란 말을 쓰는 횟수가 늘고 있다.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고 암만 애를 써도 집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그런 수고로부터 자기를 놓아주는 노숙자의 길이 있을 것이고, 가족관계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대립이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자포자기식으로 노숙자의 길로 들어선 경우도 있어 보인다. 스스로 집을 뛰쳐나간 자발적인 파산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 또한 사회현실이나 집 안팎의 무거운 공기를 감당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노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사가 다 다를 것이고, 이들을 보는 시선도 그만큼 다르다. 늦은 밤,..

감상글(책) 2023.02.04

<산문>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헌책방 기담 수집가』, 프시케의숲, 2021. -윤성근 작가는 서울 은평구에 있다는 서점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이다. 절판된 책을 찾는 헌책방 손님들에게 그 책을 찾아주는 일은 책방 주인의 남다른 능력치다. 손님으로부터 절판된 책을 찾는 이유를 듣게 되고 그 사연에 흥미를 가진 주인은 절판 책을 구해주기 전에 사연을 먼저 묻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사연이 쌓이게 되고 이번 책으로 묶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이 실화일까 소설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판 책을 찾는 기이한 사연들이 연속되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은 소설에 가깝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생각을 예상했는지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 아예, 서문 앞엔 함정을 파듯이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해두기까지 ..

감상글(책) 2023.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