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 민구식 살구나무 집 손 씨 할매 마루 끝에 앉아 꽃비 바라본다 저 나무 심을 때 둘째 딸 낳고 시아버지가 심심해하면서 심은 건데 내리 셋이나 더 딸을 낳으니 그만 뽑아 버리려는 것을 큰딸이 매달리고 말려서 살아 있는 것이라고 씁쓸히 웃으신다 그 딸이 시집을 가서 또 딸만 셋이여 ‘삼 일만 살구〜’라고 해서 살구꽃이라든가 ‘삼 년만 살자’고 해서 살구꽃이라든가 눈 한번 잘못 돌리면 꽃구경도 못 하는 살구꽃은 여우비 내리듯 우산 펼까 말까 하다가 지고 마는 절정이 짧다 떨어진 것들만 주워 먹는 살구는 열매마다 멍든 상처가 깊다 기구한 팔자가 살구꽃 같다면서 “내년에도 내가 살구꽃 볼려나〜” 살구 팔자 같은 할매 한숨이 길다 -『자벌레의 성지』, 시산맥사, 2022. 감상 – 살구나무를 뜻하는 한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