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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 권수진

아방가르드 / 권수진 혁명은 멀고 술은 가까워 익숙한 자리에서 발목을 자주 접질렀다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은 지 엊그제 같은데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은 내 일이 아니었으므로 아직 세상에 도래하지 않았다 여기서 딱 한 잔만 더 마시자며 술을 부추기는 친구 조언을 묵살하는 밤 방황이 이토록 긴 줄 알았다면 남들처럼 적당히 선에서 타협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다 사랑은 여전히 어렵고 명멸하는 별빛 속에 북극성과 카시오페이아를 자주 혼동하곤 했다 삶이란 술 취한 회전목마 같아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가끔 버거울 때가 있다 아무런 줏대 없이 자꾸 2차를 권하는 무리에 휩쓸려 집은 점점 멀어지고 길은 점차 사라지고 막차 떠난 정거장을 한참 동안 서성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면 아무래도 이번 생의 ..

감상글(시) 2023.03.26

시인학교 / 오탁번

시인학교 / 오탁번 소월이나 미당 생각하면 시 쓸 맛 영 안나겠지만 재주는 좀 없어도 꾸준하게 쓰고 또 쓰다 보면 내신 1등급 5% 안에는 들지 몰라 1등 2등 다툴 만한 고은이나 김춘수가 사람이다 말씀이다 하면서 3등급쯤으로 자진해서 나가는 걸 보면 너희들 흰소리 작작 하고 이슬비 맞으며 홀로 울면서 빗방울 찍어서 손바닥에라도 가련한 시 몇 줄 쓰고 또 쓰면 지용쯤은 친구 삼아도 되지 않을까? 박용래하고는 맞술 나눠도 큰 흉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내신성적이 뭐 대순가 실기시험으로 결판이 나는 거야 이 잡지 저 잡지로 너비뛰기 평론가 대학교수까지 높이뛰기 모든 욕 먹으며 오래달리기 심사위원 알음알음 턱걸이 하기 이쯤되면 소월이나 미당도 뒷발질로 넘어뜨리고 현대시사의 주동인물이 될 수도 있것다? (학생..

감상글(시) 2023.03.18

<소설> 통도사 가는 길

조성기, 『통도사 가는 길』, 민음사, 1996. 조성기 작가의 소설집에서 단편 「통도사 가는 길」과 「불일폭포」는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인물에 얽힌 사연들의 실마리를 좇거나 수습하면서 인물의 뒤를 따르는 여정은 퍽 흥미롭다. 표제작이기도 한 「통도사 가는 길」의 여정과 사건을 메모해 본다. 사내는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굴원 시집 『초사』를 가방에 넣고 대구행 고속버스를 탄다. 대구터미널 인근 여관에서 일박하면서 방음이 안 되는 방에서 「반야심경」과 『불의 정신분석학』을 오가며 무촉과 감촉에 대한 화두를 품는다. 이튿날 사내는 동대구역에서 삼랑진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삼랑진역은 이십구 년 전 아버지가 교원노조일로 수갑을 찬 채 부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 어머니가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남..

감상글(책) 202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