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호수 / 문병란

톰소여와허크 2014. 4. 20. 07:24

호수 /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 『법성포 여자』,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 시집을 내고 분에 넘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문병란 시인이다. 먼 고장의 시시껄렁한 내게 그랬듯이 여러 후학들에게 고루고루 마음을 내어 주셨으리라 생각하니 그 정성이 따습게 느껴진다.

  시인은 자유와 민주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직녀에게>)고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가는 일”(<인연서설>)을 노래하는 서정을 간직했다. 그 서정은 <호수>에서 잔잔한 파문을 준다.

  시인이 만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싶은 사랑은 까다롭지 않으나 특별하긴 하다.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에 오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여러 경험을 쌓고,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여러 부대낌을 지나와서,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 세상과 한 발짝 떨어져서 이웃과 자신을 살필 여유를 가질 때 비로소 보이는 사랑을 시인은 믿고 싶은 것이다. 혹한의 유배지에서 변치 않는 인심을 알아보고 <세한도>를 내어주었던 마음이 <호수>에 내려앉는 느낌이다.

  ‘호수’는 바람이 불면 잔물결을 이루다가도 이내 평정을 찾고 주변의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받아들인다. 호수의 깊이, 호수의 맑음……. 눈빛에 호수가 담겨있을지 모를 시인은 여전히 현역이다. 지금도 “내 피에 섞인 역마성은/ 먼 하늘의 흰 구름을 손짓해 부른다”고, “단벌옷으로 떠나는 이 아침에도/ 나의 목적지는 아직도 정해 있지 않다”(<가을행>)고 말할 게 분명하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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